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11/13/0200000000AKR20171113100600033.HTML?source=twitter
 
당뇨병 환자 중에 겨울철에 혈당 수치가 더 오르게 되는 경우가 많다.

추운 날씨 때문에 활동과 운동을 잘하지 않게 되며, 성탄절, 망년회 및 설날 등의 행사로 과식을 하는 일이 많아지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식을 하지 않도록 미리 계획을 세워서 스스로 식사량을 조절하여야 한다. 

옛날에는 겨울철에 야채와 과일 등을 구하기 어려워 영양부족이 생기기 쉬웠으나, 요즘에는 온상재배가 발달하여 각각의 음식을 골고루 구할 수 있다. 

그러나 가격이 비싸므로 당뇨병 환자와 같이 적게 먹어야 하는 경우에는 영양소의 부족이 생길 수 있으므로, 특히 겨울철에는 음식을 골고루 먹도록 신경을 써야 한다.

추운 겨울철에는 운동량이 부족해진다.
그러므로 실내에서 할 수 있는 체조나 운동을 하도록 하고 특수한 운동기구를 이용하셔도 좋다. 또한 요즘에는 실내 수영장이 여러 군데 있어 사계절 내내 이용하기에 편리하다. 

기온 변화가 심한 환절기나 겨울철에는 몸의 모든 혈관이 수축하여 혈압이 평상시 보다 상승한다. 특히 새벽에 찬 바람을 갑자기 쏘이면 혈압이 순간적으로 상승하여 중풍이나 심근경색 같은 치명적인 응급상태가 올 수 있으므로 특히 주의하여야 한다. 

되도록 새벽에 찬바람을 맞고서 하는 운동은 피하도록 하고 따뜻한 햇볕이 쪼이는 낮에 충분한 준비운동을 하고서 본 운동을 해야 한다. 만약 중풍이 있었거나 현재 심장병으로 치료를 받거나 고혈압 치료를 받고 있는 분은 특히 겨울철 운동에 주의해야 한다. 

등산을 다니시는 분들도 다리의 근육이 추위로 인하여 굳어 있는 상태에서 충격이 가해지면 발목에 골절이 생길 수도 있고, 넘어졌을 때에 허리나 손목뼈에 골절이 생길 수 있으므로 주의하여야 한다.

감기는 겨울철에 가장 많이 걸리는 질병이다.
당뇨병 환자의 경우 신체의 저항력이 떨어지므로 감기에 보다 쉽게 자주 걸리고 또한 심하게 앓게 된다. 

이때 식욕이 떨어져 식사량이 줄게 되면 혈당이 좋아지는 경우도 있지만 심한 감기 몸살의 경우는 혈당이 더욱 높아진다. 따라서 집에서 간이 혈당 측정기로 혈당을 재어보고서 필요에 따라 약을 줄일 수도 있고 늘릴 수도 있다. 

평상시 혈당과 차이가 많이 나면 담당의사 선생님과 상의를 하여야 한다. 감기에 걸렸을 때 종합 감기약을 큰 문제없이 복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감기약 중에서 아스피린을 먹으면 당뇨병 약의 혈당강하 작용을 증가시켜 혈당이 지나치게 낮아질 수 있고, 코막힘 증상을 완화시키기 위해 사용되는 에페드린, 페닐프로파놀아민 등을 복용하면 혈당과 혈압이 높아지는 수가 있어 당뇨병 조절이 엉망이 된다. 따라서 감기약을 처방받을 때에는 자기가 당뇨병 환자임을 밝히고 복용하고 있는 약을 알려주어야 한다.

겨울철에는 특히 발 관리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겨울에는 피부가 거칠어지기 쉽고 건조해지며, 추위로 인한 혈관 수축으로 발로 가는 혈류량이 줄어 당뇨병성 족부병변이 잘 생기게 된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 피부의 건조를 파하도록 하고 목욕이나 샤워 후 피부에 올리브유나 와세린 등을 발라 인공적인 피부 기름막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 또한 항상 발을 깨끗이 하고 압박되지 않도록 해야 하며, 온돌방에서 화상을 입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출처 :  메디컬뉴스인(http://www.medicalnews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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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 유럽 한인 차세대 대회에서 인삿말 중인 박종범 재외동포 재단 부장


129()10(), 양일간 파리 Marriotte CDG Hotel에서 2017 FLC EMEA REUNION & 유럽 한인 차세대 대회가 열렸다. 이 행사는 프랑스 한인 차세대(Jacof 팀장 : 문혜진)와 프랑스 한인회(회장 :이상무)가 주최하고, 대한민국 외교부와 재외동포재단,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유럽 한인 총연합회에서 후원했다.

20156월 프랑스 한인 차세대(Jacob : Jeunes Actifs Coréens de France)는 발대식을 가진 이후 정기적인 모임을 가지면서, 2016년부터는 후배들을 위한 멘토링 대회를 매년 개최해 오고 있다.

행사를 주최한 프랑스 한인 차세대는 프랑스 유럽 각국의 한인 차세대 청년들의 역량 결집과 네트워크 구축을 위해 다양한 분야의 재외동포 차세대 인재들을 파리에 초청하여 Future leadersConference와 유럽 한인 차세대 대회를 개최하면서 한인 청년들 간의 활동이 상대적으로 활성화 되지 않은 유럽에서, 경제 활동하는 한인 차세대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간의 단합과 네트워킹을 형성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여, 한국 문화 및 역사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갖기 위한 행사라고 밝혔다.

129일 첫날에는 이상무 프랑스 한인회 회장 및 한인 기관장 대표들, 재외동포재단의 박종범 부장 및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유럽, 아프리카, 중동 지역 12개국의 한인 차세대들 95명이 참석해서 세미나 및 워크샵이 있었고, 다음날인 10일에는 문화탐방으로, 프랑스에서 한국의 미를 느낄수 있는 파리 기메 박물관 등을 방문하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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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복 중앙일보 대기자의 강연 


129() 14시부터 시작된 행사는 재외동포 재단의 박종범 부장의 인삿말이 있었고, 이어 한우성 재외동포 재단 이사장의 인사말을 대독했다.


 

거주국의 귀중한 인재이자, 동포 사회의 주역으로 발돋음해 나갈수 있기를...

한우성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은 먼저 행사 개최를 축하했고, 지원을 한 대사관의 박용수 참사관, 프랑스 한인회 이상무 회장, 좋은 강의를 해줄 중앙일보의 배명복 대기자,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김찬중 교수,대사관의 김인수 영사 외 많은 관계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금번 행사는 유럽과 아프리카 중동 지역의 역대 한인 차세대 대회에 참여했던 임원들과 한인 차세대 리더들이 한자리에 모여 교류하는 뜻깊은 행사임을 밝히면서, ‘한인 차세대들간의 소통과 화합의 장인 이번 행사를 계기로 여러분들이 각 거주국의 귀중한 인재이자, 동포 사회의 주역으로 마음껏 발돋음해 나갈수 있기를 희망하고, 또한 차세대 리더들 간의 역량 결집과 거주국과 한인 커뮤니티를 위한 봉사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해 심도있게 토론하는 자리가 될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끝으로 이번 행사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프랑스 한인 차세대 팀의 문혜진 팀장과 여러 관계자들의 노고에 감사함을 전하면서, ‘참가자 모두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면서 우리 재단은 여러분들과 늘 같이 하겠다고 했다.

이어 이상무 프랑스 한인회 회장은 ‘2015년 프랑스 한인 차세대가 발대식을 가진 그날 저녁부터 모이기 시작해서 오늘 날까지 한번도 빠지지 않고 매달 정기적인 모임을 가지는 것을 보고 이것이 정말 네트워크라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유럽에 있는 한인 사회의 소망이 바로 여러분들이라고 하면서, ‘한인 사회는 차세대들이 있어야 그 대를 이을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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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찬중 중앙선관위 선거연수원 교수의 강연


이상무 회장은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언급하면서, 차세대들이 이런 자리를 통해서 미래를 설계할수 있는 터닝 포인트를 스스로 찾아갈수 있었으면 한다고 하면서, 힘찬 발걸음을 기원했다.      

문혜진 프랑스 한인 차세대 팀장은 인삿말에서 이번 행사를 준비하면서 화합의 중요성을 느꼈다고 했다. 또 차세대간의 교류를 활성화시키고, 한인사회 역량을 강화시키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하면서, 프랑스 한인 차세대들이 힘을 합하여 좀 더 책임감을 가지고 한인사회에 임했으면 한다는 바램을 밝혔다.

기조 강연 첫 순서로 배명복 중앙일보 국제 담당 대기자의 ‘’한국의 힘 : 전통과 현대의 융합이라는 주제의강의가 있었다. 우리 고유의 정서와 속성을 윤동주의 서시와 장사익의 봄날은 간다’, 그리고 싸이의 강남 스타일등을 보여주면서 피력했고, 두 번째 순서로는 김찬중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연수원 교수는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할수 있는 선거에 대해 강의했다. 우리나라 최초 선거부터 선거 역사,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현재 등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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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 FLC EMEA REUNION & 유럽 한인 차세대 대회에서



이어서 2팀이 1조가 되어 토론을 했는데 주제는 현지 사회 진출의 의미에 대해’, ‘유럽 내 한국인의 역량 강화를 위한 차세대의 역할’, ‘한국과 유럽 교류 및 무역 증진을 위한 차세대의 역할’,’한국이란 나에게 무엇인가 현재 살고 있는 나라란 나에게 무엇인가 ?’, ‘재외동포들을 위해 한국이 할수 있는 국내/외 정책 ?’ 등이었다.


한국인의 정체성 강조’, ‘네트워킹을 이어가고 싶다

남아공에서 온 어떤 차세대 젊은이는 한달 전에 한국에서 있었던 세계 차세대 대회때 좋은 인연들을 만나서 다시한번 보고 싶어 이번에 참석했다고 한다. 그는 강의를 통해 한국의 역사에 대해 많이 배웠고, 특히 정체성, 한국인의 고유성이 있는데, 아무리 오래 외국에서 지내도 그것은 남아있는 것 같다고 하면서, 강의를 통해 잘 알게 되었다고 했다.

뉴질랜드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젊은이는 2010년 한국에서 비슷한 행사에 참석한 적이 있다고 한다. 당시 그는 한국에서 한번도 살아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이런 행사에 내가 왜 참석했나 싶었는데, 그 이후 그때 만났던 이들과 꾸준히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게 스스로도 신기해 했다고 하면서, 그런 네트워킹을 다시 이어가고 싶어 이번 행사에 참석했다고 한다.

이태리에서 온 젊은이는 지난 달 로마에서 한인 차세대 발대식을 갖고 다른 유럽 국가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보고 배우고 싶어 참석했다고 밝혔다.

 

                                                                                                              

                                                                                                                                        <파리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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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제국은 역사상 가장 광대한 제국으로 유명하고, 당시 문명 세계의 절반을 휩쓴 몽골군의 강력함은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 입니다. 북방의 초원에서 출몰한 공동체가 곧 북중국을 휩쓸고, 동쪽으로는 고려를 넘어 일본까지 상륙했으며, 서쪽으로는 폴란드에 이르렀습니다.
 
 
이 지상 최강의 전사들의 말발굽에 중국의 황제, 페르시아의 샤, 아바스의 칼리파와 유럽의 군주들까지 모조리 짓밞혔습니다. 칭기즈 칸에 의해 1206년 몽골국이 탄생한 장장 70여년이 지난 시점의 일이었습니다.
 
 
70년.... 정확히 말하면 1279년 입니다. 맨 위의 GIF 이미지에도 나오는 부분이지만, 몽골제국의 최대 판도는 바로 1279년에 완성되었습니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쿠빌라이 즉위 이후 통합된 몽골 제국이 분열되기 시작해서 좀 애매하지만) 그렇다면 세계를 정복한 몽골제국의 발자취가 마지막으로 찍힌 나라는 대체 어떤 나라였을까요? 저 머나먼 러시아의 초원? 폴란드의 기사단들? 그것도 아니라면, 저 동남아의 입구에 해당하는 대리(大理)의 왕조?
 
 
하지만 다 아닙니다. 몽골 제국이 영토적으로 완성되는 1279년은, 다름 아닌 몽골의 송나라 정복이 완료된 시점입니다. 즉, 몽골 제국의 완성은 송나라의 멸망을 마지막으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송나라가 마지막이라고 하면 뭔가 좀 이상한 느낌입니다. 아니, 송나라는 몽골의 바로 코 앞이 아닌가?
 
 
1234년, 북중국을 지배하던 광대한 대제국 금나라는 몽골과 송나라의 연합군에게 공격을 받아 멸망 당했습니다. 그 이후 북중국은 완전하게 몽골의 손아귀에 떨어져버리고 맙니다. 북중국을 장악한 몽골은 남쪽의 송나라와 직접적인 국경을 맞닿아있었으니, 정말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이긴 합니다. 헌데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몽골군은 저 멀리 중동이나 더 나아가 러시아, 동유럽까지 진군했는데, 코 앞의 적을 내버려두고 저 멀리를 먼저 손 본 뒤에 다시 돌아와 맨 앞의 적을 마지막으로 상대한다는건 정말로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 내막을 살펴보면, 몽골군은 언제나 남쪽의 송나라와 전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훌라구의 군대가 바그다드를 짓밞고 아랍세계가 이룩해놓은 유구한 문명을 초토화시킬때도(1258년),
 
 
바투의 장자 원정군이 폴란드의 레그니차 전투에서 하인리히의 군대를 전멸시킬 때도(1241년),
 
 
지금의 운남지방에서 베트남 북부에 이르는 대리국이 쿠빌라이의 손에 의해 멸망할때도(1253년),
 
 
30년간 인고의 세월을 거친 끝에 고려 조정이 몽골과 마침내 강화조약을 맺었던 순간에서조차도(1259년), 몽골군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송나라와 전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냥 전쟁도 아니고, 그 거대한 몽골 제국을 이끄는 대칸이 직접 이끄는 군대가 선두에 섰습니다. 그러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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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가 몽골 제국이 가진 거대한 힘의 일각에 무너지고 있을때, 몽골 제국의 가장 코 앞에서는 가장 거대한 싸움이 무려 수십년간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몽골과 남송의 전쟁은 1235년부터 1279년까지 무려 44년간 이어졌습니다. 물론 중간중간 소강상태도 있었고, 44년 동안 내내 싸움만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번 전투가 벌어질때마다 엄청난 규모의 싸움들이 있었고, 전투가 없는 기간에도 늘 서로 전쟁에 대비하며 준비하고 있던 살얼음판 같은 시대였습니다.
 
 
 
이를테면 송나라의 위대한 충신으로 불리는 문천상(文天祥)이나, 결국 송나라를 멸망시키게 되는 몽골의 명장 바얀(伯顔)이 태어난 해는 모두 1236년 입니다. 자기들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전쟁이 펼쳐지고 있었고, 40살도 훌쩍 넘어 그 당시 기준이라면 슬슬 황혼기를 생각해야 할 시점에서 전쟁이 끝났습니다. 전쟁이 시작할 무렵 20살의 패기 넘치는 젊은이였던 쿠빌라이 칸은 송나라 정복이 완료된 시점에서 64살의 노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자신들의 세대 전부를 소진했던 전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44년간의 전쟁이, 그냥 간헐적으로 전투가 벌어지는 식이었다면야 굳이 소개할 필요도 없었을 겁니다. 몽골은 한두번의 승리가 아닌, 처음부터 남송을 '멸망' 시키려고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1235년의 쿠릴타이에서 몽골군은 송나라 정복을 주요 의제로 확정했습니다.(참고로 이때 쿠릴타이에서 이미 전쟁이 펼쳐지고 있던 고려에 대한 정벌도 다시 한번 의제가 되었고, 그 이후 1235년부터 1239년까지 펼쳐진 몽골군의 3차 침입에서 고려는 전국토가 몽골에 유린당하는 최악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황룡사가 불타버린것도 바로 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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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송을 공격하는 몽골군은 광대한 규모로 전역을 개시했습니다. 단 1군 마저도 위협적인 최강의 몽골 군단이 3군으로 나뉘어져 서로군, 중로군, 동로군으로 진군해 왔는데, 서로군은 사천으로 중로군은 양양성으로, 동로군은 회남 지역을 공격하는 식이었습니다. 송나라의 동쪽과 서쪽 중부 지역까지 수천리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모조리 일망타진 해버리려는 작전이었던 셈입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작전대로 되는듯 했는데, 1235년 10월 사천의 핵심지역인 '성도' 가 몽골군에게 장악 당했고, 1236년 3월 송나라의 핵심 방어전선인 양양성 마저 함락 당했습니다. 1237년에 이르자 몽골군은 동쪽으로는 황주까지 이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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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공(孟珙)
 
 
 
그런데 승승장구하는 듯 했던 몽골군은 바로 이 시점에서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유례없는 저항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저항을 이끈 사람은 바로 송나라 장군 맹공이었습니다.
 
 
맹공은 조상 대대로 무장을 배출한 가문의 자제였는데, 송나라에서 전문 무관은 장래적으로는 불우한 처지였습니다. 진사(進士)에 급제하지 못한 사람은 재상이 될 수 없는게 송나라 조정의 관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맹공은 스스로 장수처럼 행동하기보다는 되려 도인처럼 행동했는데, 본인을 스스로 무암거사(無庵居士)라고 칭하고 군사 진영을 갖추었다가 이를 거둘 때는 늘 그 자리를 치우고 향을 피웠습니다. 재물도 싫어했고 여자도 멀리했고, 심지어 식사 마저도 정말 간소하게 먹던, 무슨 재미로 살았는지 모를 대단히 정갈한 성품의 소유자였다고 합니다.
 
 
맹공은 아버지가 전쟁을 맞이해서 조직해놓았던 2만여명의 충순군(忠順軍)이라는, 일종의 사병 집단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맹공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군벌이 될 낌세가 보인다고 우려가 많았겠지만, 맹공이 워낙 고승같은 삶을 사는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의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 '무암거사' 맹공은 강릉에 대한 몽골군의 공격을 막아냈고, 연전연승을 거두면서 빼앗겼던 양양을 탈환했고, 기주를 수복했으며, 다시 사천으로 이동해서 그곳에서도 몽골군을 막아냈습니다. 몽골군은 야전에서 맹공에게 패배했고, 점령했던 지역도 다시 빼앗겼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었는데 맹공은 한술 더떠, 몽골군의 침략으로 발생한 엄청나게 많은 유민들을 이용해 광대한 둔전을 개척하고 수리 사업을 실시, 강릉과 사천 등지에서 몽골군을 막고 버틸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되자 상황이 이상해집니다. 처음의 좋던 분위기를 이어나가게 되지 못하자 송나라의 방위 전선은 점점 체계가 잡히며 강력해졌고, 반대로 몽골군은 하천과 수로가 많은 남부 지역에서 기마병단을 앞세운 특유의 기동전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부터 첫단추를 잘못 끼는 바람에 40년을 고생하게 되었다는....
 
 
 
이 몽골군과 남송의 첫 전역은 무려 6년을 이어졌습니다. 처음만 해도 동쪽으로 서쪽으로 쓱쓱 밀어버리는 분위기였던 몽골의 공격은 맹골의 활약 이후에 지지부진해졌고, 1241년 우구데이 칸이 사망하는 바람에 결국 회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완벽한 실패였습니다.
 
 
일단 물러난 몽골군은 물론 다시 송나라를 칠 생각은 가득이었지만, 당장은 새로 즉위한 '구육 칸'과 서방으로 진군해 공포의 화신이 된 '바투' 사이의 격렬한 분쟁 때문에 전쟁을 금방 속행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다시 전역이 개시된 것은 1258년, 새로 즉위한 '몽케 칸' 의 시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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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몽골 제국이 내부의 다툼으로 시간을 준 그동안, 남송은 그 막강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어마어마한 방위전선을 구축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지난 번의 전투에서 성도가 함락되며 엄청난 피해를 받은 사천 지역을 중심으로 방위 전선이 강화되었는데, 핵심은 산성방어체제였습니다. 안그래도 진입하는데 지형적으로 험준한 사천의 주요 강, 하천의 연안과 각종 교통요지의 험준한 곳에 새로 성을 쌓고, 그런 성들을 무수하게 많은 별처럼 이어지어 서로 도울 수 있게 하는 겁니다. 그런 전선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갖추는 작업도 물론 포함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시간이 되어, 몽골의 공격이 재개되었습니다. 이번 전쟁도 지난 번 전쟁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거대한 규모의 침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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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군 사령관, 몽케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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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로군 사령관, 쿠빌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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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군 별동대, 우량하타이
 
(사진은 수부타이. 우량하타이는 수부타이의 아들)
 
 
 
이 당시 몽골군의 대전략은 남송의 수도인 항주로 통하는 최단거리는 일단 무시하고, 남송의 서쪽과 남쪽에서 포위한다는 작전이었습니다. 항주로 가는 최단거리는 가깝긴 하지만, 그 길목에 엄청난 숫자로 복잡하게 꼬여있는 수로들이 득실거렸기에 기병대 위주의 몽골군 입장에선 마굴이 따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서쪽인 사천에서부터 항해서 침투하는게 가장 핵심적인 주공이었는데, 조공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오는 군대였습니다. 응? 몽골은 북쪽에 있고, 남송은 말 그대로 '남' 쪽에 있는데 무슨 몽골군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간다는 소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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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남서쪽의 나라가 대리국.
 
 
 
이 당시 몽골은 현재의 운남성 및 베트남 북부 지역의 '대리국' 을 멸망시킨 이후였습니다. 다름 아닌 쿠빌라이가 직접 멸망시켰고, 명장으로 유명한 수부타이의 아들 우량하타이가 같이 합세했었습니다. 이후 쿠빌라이는 다시 북으로 돌아갔지만, 우량하타이는 남아 있었습니다.
 
 
 
즉 당시 몽골군은 몽케 칸이 이끄는 부대가 사천을 뚫고 들어가고, 쿠빌라이의 2군이 그 시점에서 합세하고, 마지막으로 남쪽에서 올라오는 우량하타이까지 3군이 최종적으로 악주(鄂州)의 무창(武昌)에서 합류하자는 계획이었습니다. 이 3군 중에서 가장 중요한건, 말할 것도 없이 사천으로 진군했던 대 칸, 몽케의 군단이었습니다.
 
 
사천에 진입한 몽케 칸의 대군은 그 강력한 규모에 걸맞게 처음에는 승승장구 했습니다. 사천 지역의 대부분을 제대로 싸움 같은 싸움도 없이 손쉽게 항복시켜 장악했는데, 이제 문제는 왕견(王堅)이 지키는 조어성이라는 성이었습니다.
 
 
본래, 사천의 다른 지역들을 병합시키기는 했지만 대부분 몽골군의 기세를 보고 지레 겁을 먹어 항복한 것이라, 전투다운 전투는 조어성 전투가 처음이었습니다. 몽케칸은 반드시 조어성을 함락시키고 싶었지만 쉽지가 않았습니다. 몽골군의 정밀한 공성 병기도 너무나 단단한 조어성엔 별 소용이 없었고, 아무리 공격을 해도 송군은 계속 몽골군을 몰아내었습니다. 몽골군은 잠시 구름사다리를 타고 성 내 진입에 성공하긴 하나, 다시 큰 저항에 직면해 퇴각하고 맙니다.
 
 
몽케 칸은 전투가 전혀 예상외로 흐르자 당황해서 군사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회의에선 이곳에 소규모 병사만 남겨두고 쿠빌라이와 합류하자는 의견과, 아예 북쪽으로 도망가자는 의견까지 다양했는데 대부분은 조어성을 함락시켜야 한다는데 뜻을 모았습니다. 이에 몽케 칸은 계속해서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5개월이 넘도록 공성전은 아무런 성과도 없었고, 몽골의 장수 왕덕신(汪德臣)은 직접 성 아래로 가서 "싸우자!" 고 도발 했지만 성에서 쏜 화살을 맞고 전사 하기도 합니다.
 
 
 
몽골군은 조어성에 대한 지원 자체는 계속해서 차단했습니다. 외부의 지원이 조어성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오히려 조어성의 물자는 매우 풍부했고, 수비군의 사기도 전혀 떨어지려고 하질 않았습니다. 송나라 군은 대놓고 몽골군에 물고기와 밀가루를 던지며 "우린 10년도 더 버틸 수 있다." 고 으름장을 놓기도 합니다.
 
 
반면 몽골군의 상황은 절망적이었습니다. 5개월동안 싸웠지만 성과는 전혀 없었고, 오히려 많은 대신들과 장수들만 죽어버렸습니다. 비가 오는데다 더운 사천의 날씨는 몽골군에게는 쥐약이었고, 군중에서는 전염병이 퍼졌습니다. 더구나 몽케칸까지 병에 걸렸습니다.
 
 
결국 몽케 칸이 죽어버리고 맙니다. 이미 전쟁은 아무 소용없는 일이 되었고, 몽골군은 모두 후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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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잘루트 전투
 
 
 
이 합주 조어성 전투는 본의 아니게 세계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몽골 제국의 대칸이 사망하게 되면서, 몽골은 새로운 대 칸을 선출하기 위한 쿠릴타이를 열 필요가 있었고, 당시 바그다드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서진을 계속하던 서방 사령관 훌라구는 쿠릴타이 참석을 위해 회군했습니다. 다만 일부 병력을 부장에게 맡겨 두었는데, '아인 잘루트 전투' 에서 맘루크의 부대가 이 남은 잔존 병력을 격파하고 훌라구가 남긴 부장을 처형해버리면서, 끝도 없을것 처럼 계속되던 몽골군의 서진은 이 시점에서 마침내 종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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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크 부카
 
 
한편 공백이 된 대칸을 선출하기 위한 쿠릴타이를 열어야 했는데, 쿠빌라이는 전장에 나가 있고 훌라구는 저 머나먼 중동에서 아직도 오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몽케, 쿠빌라이, 훌라구 형제의 막내인 아리크 부카는 수도 카라코룸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쿠릴타이를 열어 자기 자신이 대 칸이 되려 했습니다. 당연하지만 다른 형제들, 특히 쿠빌라이가 펄쩍 뛴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쿠빌라이의 입장에선 미치고 펄쩍 뛸 일이었고, 당장이라도 돌아가 자신의 이름으로 쿠릴타이를 새로 열어 자기 자신을 대 칸으로 선출해야 했지만, 전장에서 쉽게 몸을 뺄 수 없었습니다. 만약 자기가 그냥 철수한다면 대리에서 올라오던 우량하타이의 별동대가 남송 군대의 한복판에 갇히고 맙니다. 우랑하타이는 같이 대리국을 정복했던 측근으로서 큰 힘이 될 수 있는 사람이었기에, 쿠빌라이는 악주성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만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몽케의 사망과 아리크 부카의 대칸 즉위 준비로 인해 지원은 기대할수도 없고, 악주성을 포위하고 있다지만 남송 한복판에 자신들의 군대만 남아있으니 역으로 말하자면 자기 자신이 포위된 셈이었습니다. 이대로라면 군사를 당장에 뺀다고 해도 물러날때 큰 피해를 입을 게 뻔한 상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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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도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악주의 수비사령관으로 이후에 재상이 되는 가사도(賈似道) 였습니다. 가사도는 조정에 알리지 않은 채 쿠빌라이와 몰래 '밀약' 을 맺었고, 쿠빌라이의 철수를 보장해주었다고 합니다. 대신, 가사도는 부교를 놓고 강을 건너 철군하는 쿠빌라이 군의 후방에 경미한 공격만을 가했고, 쿠빌라이를 물리쳤다는 '전공' 을 획득했습니다. 그야말로 서로의 속셈이 오고간 드라마틱한 장면입니다.
 
 
어찌되었건 합주 조어성에서 몽케 칸의 부대가 패배했고, 쿠빌라이 군이 악주에서 회군했으며, 곧 우량하타이 군 역시 부교를 건너 돌아갔습니다. 몽골 제국의 대 칸이 친정에 나선 두번째 대규모 작전도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쿠빌라이가 돌아간 이후, 그는 약식으로 쿠릴타이를 열어 스스로를 대 칸으로 만들었고, 몽골 제국은 내전에 돌입했습니다. 간단하게 승리를 거두고 지배자가 된 쿠빌라이는 우구데이 칸과 몽케 칸이 모두 실패했던 남송 원정을 다시 재개하려고 했습니다. 다만, 이전의 패배를 면밀하게 분석한 쿠빌라이 칸은 작전을 바꾸기로 결심합니다. 광대한 영역에 풍부한 자원을 갖춘 남송을, 이전처럼 전역을 동시 타격하는 방법으로는 큰 효과를 거두기엔 어렵다고 본 것입니다. 대신, 적의 핵심적인 방어 기지에 모든 전력을 들이붙기로 했습니다.
 
 
그곳은 바로 양양성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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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장렬한 공성전 중 하나, 양양 공성전.
 
 
그리하여, '세계를 지배하는 몽골 제국의 핵심 주력' 이 물밑듯이 쏟아져 왔고, 양양성은 그런 적을 상대로 결사적인-그렇지만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전투를 지속했습니다. 못 버틴것도 아닙니다. 양양 공성전은 무려 1267년부터 1273년까지 6년동안 이어졌습니다. 보통이라면 그만하고 물러갈 법도 한데, 몽골 제국 측에서도 가지고 있는 전력을 때려붙는 느낌으로 끝까지 전투를 지속했던 겁니다.
 
 
1268년, 무려 10만 명의 몽골 병력이 양양성을 포위 했습니다. 참고로 여몽전쟁 당시, 살리타이가 이끌고 온, 고려라는 나라 하나를 공격하기 위해 온 몽골군의 숫자가 3만입니다. (그나마도 이후 줄어듬) 성 하나의 포위에 10만명이라는 군세를 동원한게 어느정도인지 감이 오실 겁니다. 이 10만의 병력은 몽골군, 거란군, 여진군, 한족 병사가 섞인 다민족 병력이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쿠빌라이는 500척이 넘는 함선을 새로 건조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양양 주변의 하천, 수로를 장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야말로 가지고 있는 북중국의 재력을 아낌없이 쏟아붙는 수준이었습니다.
 
 
당연한 소리지만 10만이나 되는 군사를 멍청하게 성 앞에 그냥 뚫레뚫레 세워둘리는 만무하고, 몽골군은 그 10만의 병력을 이용해서 양양 주변을 기다랗게 포위하는 포위망을 구축합니다. 그리고 아예 사방에서 진지 공사를 하면서 장기전으로 끌고갈 준비를 했습니다. 물론 양양성의 병력들도 구경만 하지 않고 중간중간 뛰쳐나와 진지 공사를 하는 몽골군을 공격했지만, 숫적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바람에 이런 시도 자체를 저지할수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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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북도 통일 되었고, 북중국도 점령 되었고, 서하도 멸망했고, 서요도 병합 당했고, 호라즘도 망했고, 대리도 점령 당했고, 이란-페르시아까지 손아귀에 닿았고, 러시아가 지배하에 떨어졌고, 동유럽도 공격 당했고, 고려도 항복한 상황.
 
 
 
포위망을 구축하는 몽골군은 결코 성급하게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비교적 양양성과의 직접적인 교전은 자제한 채 계속해서 포위망을 유지하고 늘리고 견고하게 만들었고, 군사를 이끌고 양양성 주변을 순례하며 근처의 송나라군을 몰살, 성 내와 직접적인 연결을 막으려는 작전에만 집중했습니다. 즉, 말려죽이려는 셈입니다.
 
 
 
해자를 파고 성채를 쌓고, 곳곳에는 파수용을 겸한 돈대(燉臺)가 세워졌으며, 양양과 그 근처의 번성까지 한꺼번에 두르는 환성(環城)이라는 이름의 토성이 만들어졌습니다. 심지어 그런 포위망이 한겹도 아니고 이중으로 이어졌으며, 그 둘러싼 포위선을 쭉 펴서 이으면 100km에 이를 정도였다고 합니다.
 
 
여기에 몽골군은 송나라의 수군이 수로를 통해 공격해오는 것을 막기 위해, 환성의 포위선 상류와 하류에서 몽골수군의 훈련을 반복해서 시켰으며, 그것이 대충 끝나면 육상의 각 부대와 연동한 합동 군사훈련이 몇 번이나 반복하여 실시했습니다. 말 그대로 포위전을 몽골 수륙군의 합동 연습장으로 만들어버린 겁니다.
 
 
 
쿠빌라이는 이 거대한 전쟁을, 어떠한 전장의 기책이나 우연, 소설에나 나올 법한 신기묘산의 재주로 타개해갈 수 있는 장소가 되지 않도록, 완벽하게 통제했고, 전투, 작전, 편성, 훈련 모든 부분을 일종의 '종합사업' 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양양성에 아무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명장이 있고, 불세출의 작전을 떠올린다 한들, 어떠한 변수가 만들어낼 수 없는 그런 환경으로 이끌어버린 겁니다.
 
 
 
그러나 송나라군은 이 철통같은 포위를 뚫고, 성 밖에서 안으로 물자를 제공하는데 성공합니다. 1269년 봄, 강물의 물이 불어나는 틈을 타 하귀(夏貴)가 포위망을 돌파해 물자를 성에 투입한 겁니다. 다만 하귀는 겁이 났는지 성에 입성하진 않고, 성 아래에서 성 위에 있는 양양성을 지키는 사령관 여문환과 몇마디 대화를 나누고 돌아가는 정도에 그쳤습니다.
 
 
 
그러자 몽골군이 당황한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런식으로 지원이 들어온다고 하면, 포위를 유지하는게 의미가 없으니 말입니다. 다만 얄궃게도, 이럴때 몽골군의 풍부한 인적 인프라가 빛을 발하는데, 다름아닌 한족 출신 장교들이 작전을 내서 활약했습니다. 성벽 포위전에 일가견이 있다는 평을 받던 사천택(史天澤)이 수비를 강화하고, 장홍범(張弘范) 역시 "이런식이면 포위 의미가 없다. 더 확실하게 조여버리자." 라며 안그래도 강력하던 수비라인이 한층 강화되어 더욱 막강해졌습니다. 당연히 기겁한 양양성 내의 병력은 이를 막기 위해 나섰지만, 장홍범은 오히려 이들을 격퇴해버리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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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몇중으로 쳐진 포위라인.
 
 
 
여기에 더해 본래 남송의 장군이었다가 몽골에 항복한 유정(南宋) 등에 의해 앞서 말한 '몽골 수군' 이 육성되면서, 수천척의 함선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몽골과 남송의 전투라고 하면 몽골족 vs 한족의 전투처럼 생각될 수 있지만, 실상은 '몽골이 장악한 세계 전부의 기술, 물적 인적 자원력' vs 남송의 대결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하이브리드함 때문에 더 강력하기도 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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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방위라인이 강력해지다보니, 송나라 역시 외부의 양양성 지원 및 내부에서의 외부와의 연락을 위해 온갖 신출귀몰한 작전은 다 짜냈습니다. 하루는 수영 잘하는 병사를 모집한 다음, 구원 요청을 청하는 작전 개요서를 숨겨 병사의 상투속에 집어넣었고, 그 병사들을 풀더미 속에 숨겨 강에 둥둥 떠가게 했습니다. 아무리 몽골군이 포위를 강하게 하며 감시를 한다한들, '강 위에 떠가는 풀더미' 따위까지 뒤져보진 않을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작전은 실패했고, 들켰습니다. 물론 몽골군이 풀더미 하나까지 다 조사해본건 아닙니다. 다만, 갑자기 강물 위에 떠가는 풀더미를 본 몽골군 병사들이 "야, 갑자기 풀더미가 막 내려오네. 몇개 건져서 말려가지고 떌감이나 쓰자." 고 갈고리 짓을 했는데 이로서 귀신같이 걸려버리고 만 겁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 작전은, 적의 포위와 감시만 더 강하게 해주는 결과만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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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는 사력을 다해 양양성을 지원하려 했지만, 모든 시도는 몽골군의 압도적인 수비력 앞에 무위로 돌아갔습니다. 지원하려는 규모가 작았던 것도 아닙니다. 1269년 7월에는 하귀가 재차 전선 3,000척과 군대 5만명을 이끌고 몽고와 전투를 벌여 대패했습니다. 1270년 9월에는 범문호가 전선 2,000척을 이끌고 나섰다가 패배하였으며, 이듬해인 1271년 6월에는 역시 범문호가 10만에 달하는 수군을 이끌고 양양으로의 진격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했습니다. 69년부터 71년까지, 양양성 주변의 강에서는 수천여척의 함선과 수만명에 달하는 병력이 매일같이 뒤엉키고 교전하고 싸우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혼돈의 장이었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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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이렇게 되자, 외부의 송나라군은 양양성을 지원하기 위해 특수부대, 즉 결사대를 조직하기에 이릅니다. 특별히 용감한 3,000명의 병사가 선발되었고, 용맹하고 지혜로워 모든 장병들에게 존중받던 장귀와 장순이라는 두 장군을 특별히 뽑아 이들을 맡겼습니다. 장귀는 체구가 비교적 왜소했기에 '왜장' 이라고 불렸고, 장순은 죽원 출신이었기에 '죽원장' 이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이 왜장과 죽원장은 결사대를 소집해서 출발전에 연설을 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죽으러 가는 것이다."
 
 
"목숨을 바치러 가는 것이지, 살고자 가는 것이 아니다. 혹여 이번 작전에 참가하는걸 마음속으로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대오에서 빠지거라. 대사를 그르칠 순 없다."
 
 
그러자 오히려 모든 결사대원들이 의기가 충전해져서 분투한것을 맹세했다고 합니다.
 
 
결사대원들은 몽골 수군이 빽빽하게 차 있는 곳을 향해 '자살특공대' 나 다름없는 공격을 퍼부었고, 120여리를 가는 동안 엄청난 전투를 겪은 끝에 기적처럼 돌파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지원군을 구경하는것은 거의 포기하고 있던 성내에서는 지원이 도착하자 감격해하며 사기가 올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장순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며칠 뒤 갑옷을 입은 시신이 떠내려왔는데, 건져놓고 보니 장순이었습니다. 장순의 몸에는 화살이 여섯개나 꽂혀 있었고, 네 곳에 상처가 났던 상태였습니다.
 
 
양양성을 지키던 여문환은 장귀에게 같이 계속 여기서 싸우자고 권했지만, 장귀는 결사대를 이끌고 돌아가서 연락망을 구축하겠다며 떠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습니다. 하지만 성내에서 나가는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바, 외부의 지원이 필요했기에 수영과 잠수를 잘하는 사람 두 명을 몰래 먼저 파견해 외부와 연락케 했습니다. 이 당시 몽골군은 물 속에 쇠사슬 수십개를 설치하고 말뚝까지 박아놓은 상태였는데, 이 두 명은 톱을 가지고 잠수해서 조금씩 이를 잘라 결국 뚫고 나가는데 성공했고, 결국 외부와 연락을 한뒤 다시 돌아오는것까지 성공했습니다.
 
 
 
어렵사리 연결된 작전에 따르면, 장귀의 결사대가 빠져 나오면 성 밖에 있던 하귀가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이들을 수습해가는 것이 요지였습니다. 그래서 이제 출발을 하려고 보니, 결사대원 중에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무언가 실수를 저질러 곤장을 맞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곤장까지 맞고 앙심을 품은채 사라진 사람이 어디로 갈지는 뻔한 일이라... 작전은 곧 들통난다고 봐야겠지만, 장귀는 "이제 계획은 곧 탄로나게 되었지만, 서둘러 출동하면 저들이 알아차리기 전에 빠져나갈수 있을지도 모른다." 며 출동을 감행했습니다.
 
 
 
장귀의 결사대는 곧 적의 습격을 받았지만, 믿을 수 없는 용맹과 기적까지 더해진 덕분에 탈출에 성공했고, 목적지까지 도착했습니다. 목적지에 도달하자 곧 함선이 보였고, 미리 약속해 두었던 하귀의 부대와 만나게 되었다고 여긴 장병들은 모두 환호성을 내지르며 기뻐했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무렵, 결사대원들이 빠져나갔는지 알 수 없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양양성 앞에 4명의 송나라 병사들이 나타났습니다. 아니, 이렇게 포위가 삼엄한데 어떻게 포위망을 뚫고 온건가? 어리둥절한 양양성의 군사들 앞에 4명의 송나라 병사들이 무언가를 들이밀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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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 아닌 장귀의 시체였습니다.
 
 
 
그 4명의 송나라 병사들은 이미 진작에 몽골에 항복한 병사들이었고, 병사들이 가지고 온건 결사대를 이끌고 나간 장귀의 죽은 시체였던 겁니다. 그리고 몽골군은 장귀의 시체를 보이며 이런 말을 양양성에 전했습니다.
 
 
"너희들은 왜장 도통을 아는가? 이것이 바로 그의 시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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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이렇습니다. 작전 이틀전에 풍랑이 불어 하귀의 군사들은 목적지에 오지도 못했고, 투항병을 통해 정보를 얻어들은 몽골군은 미리 약속 장소를 장악하고 가만히 앉아 쉬고 있다가 온갖 고생을 하고 도착한 결사대를 습격한 겁니다. 죽을 고생을 하고 간신히 사지를 벗어나와, 그런 그들을 반겨주는 아군인줄 알았던 함선들이 사실은 적의 함선들이라는것을 안 장병들은 싸울 의지를 모두 잃어버리고 학살당했고, 장귀 역시 사로잡혀서 투항을 거절한 끝에 결국 처형 당하고 말았습니다.
 
 
 
죽은 장귀를 본 양양성내의 송나라 병사들은 모두 통곡을 멈추지 않았고,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지고 맙니다.
 
 
그나마 이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최후의 결사대 마저도 결국 적의 조리돌림 신세로 전락한 이후, 양양성을 향한 모든 지원은 끊겼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양양성은 버티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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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만의 군대를 동원하고, 수천여척의 함선을 동원하고, 무려 5년이 넘게 포위를 지속하는데도, 저 가공할 저력을 가진 성은 무너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을 타개한 사람은 바로 장홍범이었습니다. 양양성 주변의 번성을 공격하다가 부상을 입은 장홍범은 "번성이다. 번성을 함락해야 한다. 번성과 양양은 순망치한이니, 번성만 함락하면 양양이 무엇을 믿고 버티겠는가?" 하고 주공을 번성으로 돌려야 한다는 의견을 전했고, 이를 쿠빌라이가 받아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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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몽골군의 힘을 한족 병사도 흡수하고 수군도 만드는 '하이브리드' 함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때 번성 함락 작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중동의 훌레구 울루스에서 온 이슬람 기술자가 만든 회회포(回回砲)가 중국 강남의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회회포의 공격으로 번성의 성벽이 무너졌고, 그 사이로 몽골군이 물밑듯이 쏟아져왔습니다. 번성을 지키던 수비대장 범천순은 미친듯이 쏟아져오는 몽골군을 보더니, 하늘을 우러러 보며 한탄했습니다.
 
 
"나는 살아서 송나라의 신하가 되었으니, 마땅히 죽어서도 송나라의 귀신이 되리라!"
 
 
그리고 목을 메어 죽었습니다.
 
 
번성을 지키던 또다른 장수인 우부는 백여명의 결사대로 무수하게 많은 적병을 베어내며 저항했지만, 결국 중과부적으로 이길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기둥에 스스로 머리를 찍은 뒤, 불길속에 몸을 던져 자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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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문환
 
 
 
번성이 함락된 후 다음 목적은 말할것도 없이 당연히 양양이었습니다. 번성이 함락당해 심리적인 위안을 나눌 최후의 방벽도 사라졌고, 번성을 무너뜨린 회회포는 매일같이 양양을 포격하고 있었습니다. 양식은 떨어져가고, 지원은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성내의 분위기는 최악이 되어갔습니다.
 
 
이미 투항해서 달아나는 장병들도 적지 않게 있었습니다. 성을 지키던 여문환은 매일같이 순시를 했고, 매일같이 통곡 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절망적인 저항을 계속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번성 함락으로 여유가 생긴 몽골군 측에서는 이제 곧 양양의 함락은 시간문제로 여기고 있었지만, 여문환에 대해서는 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대로 함락 작전으로 간다면 필시 여문환은 전사하거나 성이 함락 되는 중에 자살할게 분명했습니다.
 
 
"여문환의 일가는 대대로 남송의 중요 무직을 거쳤다. 중앙 정계의 요직 가운데 일족 자제들도 많다. 이러한 관계로 여문환은 남송 조야에 있어 누가 현명하고 누가 어리석은지, 남송 산하의 성곽 가운데 어느 것이 견고하고 어느 것이 허술한지, 또한 남송 군대의 많고 적음과 그 허실이라든가, 남송 군사 및 정치의 옳고 그름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것이 없는 인물이다."
 
 
몽골군 내부에서는 '여문환은 죽게 두는것보단 살려서 유용하게 쓰는게 좋은 인재다.' 라는 의견이 강했고, 여문환을 항복시키기 위해 사람을 파견했습니다. 처음에는 여문환의 부하였다가 몽골에 투항한 당영견(唐永堅)을 보내 설득했으나 여문환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몽골의 아릭카야라는 인물이 호위병 몇 사람만 거느리고 양양성 아래로 가 여문환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그대는 실로 몇 년 동안이나 고립된 군대를 이끌고 양양성을 지켜왔도다! 그러나 이제는 나는 새라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우리 황제께서는 그대의 충성스러움을 가상히 여기고 계시다. 만일 투항한다면 필시 높은 관직을 내리실 것이다. 우린 결코 그대를 죽이지 않겠다."
 
 
여문환이 머뭇거리자, 아릭카야는 화살을 부러뜨리며 맹세했습니다. 아릭카야의 옆에 있던 장정진(張庭珍)도 거들었습니다.
 
 
"우리 군대는 일찍이 전세계를 공격하여 무너뜨리지 못한 곳이 없었다. 그대는 고립된 성에 갇혀 있고 이제 탈출로도 끊겼다. 바깥으로는 지원군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대는 성을 지키다 죽었노라는 헛된 공명을 바라고 있는가? 그렇다면 성내의 사람들은 무슨 죄란 말이냐?"
 
 
이 말을 들은 여문환의 부하들이 먼저 나서 "할만큼 했다" 며 투항을 간곡하게 요청하자, 결국 여문환도 더는 버티지 못하고 투항을 하고 말았습니다. 장홍범은 여문환을 데리고 쿠빌라이를 알현케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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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얀
 
 
양양성이 함락된 시점에서 송나라의 멸망을 정해진 것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쿠빌라이 칸이 신임하는 장수인 명장 바얀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이제는 무너진 방위라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돌파하여 중국 남부로 파죽지세로 진격했고, 여문환 등이 여기에 함께 했습니다.
 
 
양자강을 건너 진군하려던 바얀의 앞에 송나라 수군이 나타나자, 바얀은 "항복하라" 며 4일 동안 회유했지만, 항복한 송나라 장수는 단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송나라 수군의 결사항전에 바얀의 군대도 상당히 고전했으나, 작전을 바꿔 철기병을 멀리 우회해 따로 상륙시켜 후방에서 적을 동요케 하자 심리적으로 흔들린 송나라 수군은 결국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최후의 장벽도 무너지자, 마침내 재상 가사도가 13만 대군을 이끌고 나섰으나, 이 마지막 군대도 바얀의 20만 대군에게 결국 패배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조직된 정부 차원의 송나라의 저항은 끝이 난 셈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곧 수도 임안이 함락되었고, 송나라의 공제도 원나라의 수도 대도로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수도가 무너지고 황제가 끌려가는 상황이었지만, 아직 송나라는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장세걸, 육수부, 문천상 등의 일부 대신들은 익왕 조하와 광왕 조병이라는 두 황족을 데리고 푸저우로 이동해서 망명정부를 만들어 계속 저항을 이어갔습니다. 물론 바얀은 이런 그들을 잡으려 했지만, 망명정부파의 양진이라는 인물이 "내가 저들의 진영에 가서 시간을 벌겠다." 며 대놓고 가서 사로잡히면서 시간을 벌었고, 그 사이에 나머지 인물들은 도망치는데 성공한 겁니다. 결국 푸저우까지 함락 당하자, 이들은 홍콩 근처까지 도주해서 계속 정부를 이어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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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갈수도 없는 바다 끝까지 몰릴때까지 이어지는 송나라의 저항
 
 
 
그리하여 홍콩 근처의 애산에서 소략한 임시 정부를 꾸린 최후의 잔존세력은, 군-민을 합쳐 모두 20만명 가까이 되었습니다. 아직, 숨을 쉬고 있는 '정부' 의 기틀은 거의 다 육수부가 전담해서 책임졌는데, 육수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꼿꼿하게 행동하다가도, 조정이나 군대에 혼자 있게 되면 늘 비통한 생각에 눈물을 흘렸으며, 그 모습을 본 다른 사람들도 다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이 조그마한 망명 정부 조차도 남겨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고, 망명정부를 지도에서 지워버리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습니다. 그 군대를 이끈 사령관은 장홍범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장홍범과 장세걸은 친척 사이였습니다. 두 친척이 최후의 결전에서 맞붙게 된 겁니다.
 
 
 
싸움에 앞서 누군가가 장세걸에게 "원군이 애산으로의 입구를 차단하면 우리 모두는 갇히고 만다. 좀 더 이동해서 싸우자. 이기면 나라의 복이고, 지면 물러나서 훗날을 기약하면 된다." 고 말했지만, 계속되는 도주생활에 지친데다 만약 움직이면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달아날까봐 두려웠던 장세걸은 "언제까지 도망을 치겠나. 어쨌든 여기에서 다 끝내자." 며 이를 거절했습니다.
 
 
장홍범은 싸움에 앞서 사람을 보내 친척인 장세걸에게 항복할 것을 권했습니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무려 세번을 권했지만, 장세걸은 이렇게 거절했습니다.
 
 
"나 역시 항복이 무슨 말인지 안다. 생명의 귀중하다는 사실 역시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단지, 주군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변심하지 않으려는 것 뿐이다."
 
 
장세걸이 말을 듣지 않자, 장홍범은 당시 몽골군의 포로로 잡힌 문천상에게 장세걸을 항복시키는 편지를 쓰라고 요구했습니다. 문천상이 거절했지만 장홍범이 계속 요구하자, 문천상은 다른 시 한편을 써서 보여주었습니다.
 
 
예로부터 누구나 인생은 한번 죽는 법.
단지 일편단심 보존하여, 역사에 길이 남겨야 할 뿐
 
 
이를 본 장홍범은 헛웃음을 지었고, 더 이상 편지를 쓰라고 요구하진 않았습니다.
 
 
함대전으로 펼쳐진 애산 전투의 초반은 장세걸이 이끄는 부대가 유리해보였지만, 장홍범은 물러나서 풍악을 올리며 쉬는척을 하더니 이내 포위전을 개시했고, 포위당한 송나라 병사들은 먹을게 없어 바닷물을 마시고 구토하며 버텼으나 결국 완전히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수백척이나 되는 함선이 가라앉았고, 수만명이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이때 육수부는 완전히 패망하기 직전까지도 7살이 된 황제에게 역사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모든 것이 확정되자, 어린 황제와 함께 같이 물어 뛰어 들었습니다.
 
 
황제의 어머니인 양태후는 패전의 대혼돈 속에서 구출되었으나,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내가 더 살아서 무엇을 하겠나" 며 바닷물에 몸을 던져 자결했습니다.
 
 
장세걸은 전투의 마지막까지 살아남았습니다. 양태후의 시신을 수습해 제를 올리고, 안남 지역으로 재기를 위해 떠나려 했는데, 떄마침 태풍이 불어닥쳤습니다. 그러자 하늘을 우러러 보며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신이 조 씨를 위해 힘쓸 일은 이제 다 끝나고 말았습니다. 정녕 이것이 하늘의 뜻입니까? 하늘이 만약 송을 망하게 하려는 것이 그 뜻이라면, 신 역시 이 바다에 잠겨 죽게 해주소서."
 
 
이윽고 거대한 풍랑과 함께, 장세걸의 배도 뒤집히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송나라는 멸망했습니다. 세계 최강의 국가의, 가장 강력한 군단을 상대로, 가장 오랫동안 맞서 싸운 끝에 이 세상의 땅 끝에서 황제도 태후도 대장군도 재상도 한 사람도 남지 않고 전부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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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몽고기병이 폭풍처럼 유라시아를 석권할 당시, 그들은 오직 남송에서만 가장 격렬하고 지속적인 저항을 받았다. 1235년 원나라 군대가 처음 송을 공격했을 때 부터, 1279년 광동 애산에서 남송 최후의 승상 육수부가 어린 황제를 등에 업고 바다에 뛰어내릴 때 까지, 남송은 장장 40여년간 전쟁을 벌여 몽케 칸 또한 합주 조어성에서 전사하였다.
 
장원급제 출신 재상 문천상을 중심으로 한 사대부들이 최후의 궁지에서도 혈전을 벌이며 송 황실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일은, 조송(趙宋)의 제실(帝室)이 300년간 사대부를 우대한 것에 대한 최선의 보답이었으며, 송대 문관정치가 거둔 유종의 미 그 자체였다.
 
-중국 과거 문화사 中-
 
 
 
 
 
몽골과 남송의 전쟁은 40년이 넘게 펼쳐진 전쟁이고, 수십만의 대군이 참여했으며, 수천여척의 함선이 동원되었으며, 유목민족과 한인, 중동의 기술이 모두 뒤엉킨 그야말로 대격전이었습니다.
 
 
송나라는 역대 중국사의 왕조들 중에서도 유독 허약한 이미지가 강하고, 수 많은 송군 굴욕의 역사 일화가 조롱거리로 언급되는 등등 송나라 사람들은 "책이나 읽고 글이나 외울 줄 알지 '상무정신' 이 없어서 칼들고 싸울줄 모르는 인간들." 이라는 식으로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실제로 송나라가 기질적으로 허약한 나라였을진 모릅니다. 그러나, 역대 어느 왕조와 비교해도 더 장렬하게 순국하고 끝까지 뜻을 꺾지 않고, 변절하지 않은 사람이 많았다는 평을 듣기도 합니다.
 
 
물론 송나라가 멸망할때도, 요직에 있다가 자리를 버리고 도망친 조정대신이 '수십 명' 가량 없는것은 아닙니다. 당시 송나라의 태황태후는 "우리나라가, 사대부를 예로 대접하기를, 300년을 하였것만." 이라고 탄식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청나라의 조익이 이십이사차기에서,
 
 
"역대 이래 몸을 던지며 나라에 순국한 자는 유독 송 말에 많았다. 패망을 구하진 못했다고 해도, 요컨대 나라가 사대부를 양성한 보람이 없었다고 할 수 없다."
 
 
는 평을 하기도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참 묘한 서사인것 같습니다. 그 수많은 중국사의 왕조 중에서도, 가장 허약하다며 일반인들에게 조롱받는 나라의 '약골' 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를 상대로,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가장 결사적으로 싸웠다...
 
 
소위 말하는 '강함' 이라는건 참 여러가지가 있구나 싶네요.
 
 

 

출처https://pgr21.com/pb/pb.php?id=freedom&no=73040
 

프랑스,‘신뢰사회를 위한 국가법률안 제출

 - 행정처리의 현대화와 간소화 시동 -

엠마뉘엘 마크롱 정부(Emmanuel Macron)가 복잡한 규제와 산더미 같은 서류를 요구하는 것으로 악명 높은 프랑스의 행정 처리를 모던하게 개선하고 간소화 하기 위한 개혁을 추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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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롱(E. Macron) 정부가 악명높은 프랑스적 관료주의 개혁에 본격 나섰다. 시장 친화적 노동 개혁에 이어 공무원 조직의 비효율성과 규제를 줄여 기업하기 좋은 나라로 변모하겠다는작은 정부구상이 목표다. 행정 간소화뿐이 아니다. 마크롱은(지나치게 비대하고 비효율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온 프랑스의) 공공부문 개혁의 하나로 임기 내에 공무원 12만명 감축도 추진 중이다. 이에 따라, 프랑스 특유의 고질적인 체질 개혁에 대한 공공 부문 노동계의 거부감을 어느 정도까지 완화할 수 있을지가 이번 개혁 성공의 관건으로 지목된다.

제랄드 다르마냉(Gérald Darmanin) 공공예산부 장관(le ministre de l'Action et des Comptes publics)은 지난 27일 국무회의에신뢰사회를 위한 국가’(projet de loi pour un Etat au service d’une société de confiance) 법률 제정안을 제출했다. 개인(사용자) 또는 기업이 선의 따라 행동한다고 간주하는 이 법안에는 각종 행정처리의 비효율을 줄이고 절차를 대폭 간소화하는40개 조항(composé de 40 articles)을 주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르마냉 장관은 « (행정 절차에서) 선의의 실수가 발생하는 이유의 상당수가 정부 규제와 절차의 복잡성에서 비롯된다 »고 설명했다. 이로써, 행정처리절차 간소화 검토에 본격 착수한 정부는 검토를 거쳐 내년 여름 의회에 이 법안의 최종안을 제출할 방침이다.

정부는 특히 개인(민원 당사자)과 기업에 세금 신고와 관련해실수할 권리(droit à l'erreur)’(국가와 정부기관이 아닌) 우선적으로 부여하는 방식으로 개편하기로 했다. 국세청은 그동안 세금 신고 과정에서 매우 많은 서류를 요구해 놓고도 서류가 미비하면 당사자의 진의를 묻지도 않고 무조건 과징금을 부과해 왔다. 이번 법안이 통과되면 개인이나 기업이 고의로 누락시킨 것이 아니면 과징금을 물지 않고 실수로 누락한 몫만 보충할 수 있다. 여기서 신고 당사자가 세금을 탈루하려 했는지는 정부가 입증해야 한다. 정부는 아울러 규제의 총량을 통제해 정부 규제가 지나치게 많아지는 것도 막기로 했다. 에두아르 필리프 총리(le Premier ministre Edouard Philippe)는 이미 지난 7월 정부부처가 새로운 규제 하나를 만들 때마다 낡은 규제 두 개를 없애야 한다는 행정명령을 승인한 바 있다.


민원서류 요구 대폭 줄이고 창구 개방시간 연장 등 정부기관 체질 개선 추진

정부는 2022년까지 행정 절차에서 요구하는 종이 서류 양식을 단계적으로 없애고 온라인 접수 방식으로 개편하기로 했다. 또한, 오후 8시까지 일부 정부기관 창구를 개방해 민원인들이 퇴근한 뒤에도 행정처리를 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할 방침이다. 이밖에, 거의 모든 행정 절차에서 민원인에게 필수서류로 받아 온 거주증명서 요구도 최소화하기로 했다. 정부는 간소화를 통해 45억 유로( 5 7000억원)의 지출을 줄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 같은 행정 간소화 개혁은 엠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다. 주무장관인 다르마냉 장관을 중심으로 개혁안의 초안이 마련돼 여름에 대통령 보고가 이뤄졌지만, 마크롱은 « 너무 뒤죽박죽이고 관료주의적 »이라며 재작성을 지시할 만큼 사안을 직접 챙겼다고 알려졌다.

문제는 공무원의 업무 부담과 처우 악화 가능성에 따른 공공 부문 노동계의 반발이다. 유럽연합(EU) 회원국 중 가장 많은 580만명에 달하는 프랑스 공무원의 평균 노동시간은 지난해 1584시간이다. 민간 노동자(1694시간)와 비교할 때 100시간 이상 적다. 그래도 지난달 9개 공무원 노조 소속 40만명이 마크롱 개혁에 반대하는 총파업을 벌일 정도로 조직력이 강하다. 마크롱 대통령은 국내총생산(GDP) 56.5%를 차지하는 공공 분야 지출을 줄여야 민간 경제가 활성화된다는 지론으로 임기 내 공무원 12만명 감축도 추진 중이다.


프랑스 언론,‘크리스마스에 앞선 선물호평vs‘프랑스의 고질, 개혁 어렵다회의론

이번 행정 간소화 조치에 대해 프랑스 언론과 사회는 환영과 의구심을 동시에 표했다. 정부기관의 비효율적인 일 처리에 진절머리를 내온 프랑스인들 사이에서크리스마스 전에 찾아온 선물이라는 호평(‘르쿠리에Lecourrier’베르트랑 마이넬 논설위원)도 나왔지만, 한편에선 프랑스가 과연 이같은 근본적인 체질개혁에 성공할지 회의적인 목소리도 나온다. 일례로,‘로피니옹L'Opinion’의 레미 고도 편집장은 « 선출직 공직자들이 민간사회를 신뢰하지 못하고 개인의 책임과 자유를 짓밟았기 때문에 프랑스에서 개혁이 불가능하고 행정 간소화는 더더욱 어렵다 […] 국가의 역할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 »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프랑스 경제가 호조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 마크롱식 관료주의 개혁에 청신호로 해석되면서 마크롱의 이같은 조치들은 힘을 얻고 있다는 평가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마크롱 정부의 노동·세제 개혁 등으로 프랑스의 올 경제성장률이 지난해보다 0.5% 포인트 오른1.7%를 기록할 전망이라고 보도했다. 9월 구직자 수도 8월 대비 6 4800명 줄어드는 등 고용 시장 역시 성장세를 보인다. 지난 9월 해고 요건 완화를 골자로 하는 노동개혁안이 큰 저항 없이 의회를 통과한 것도 개혁에 대한 믿음을 반영한다는 분석이다. 프랑스 여론연구소(IFOP)가 지난 18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 마크롱 대통령의 지지율은 46%로 집계돼 지난8 40% 에서 소폭 반등한 것으로 나타났다.


< 파리지성 / 현 경, dongsimijs@gmail.com >

 

원문 영상은 링크



[앵커]
술에 취한 20대 남성이 길가에서 여자친구를 무차별 폭행하다 못해 트럭을 몰고 돌진하기까지 했는데요

보다 못한 시민들이 직접 나서면서 남성의 난동은 끝이 났습니다.

신지원 기자가 단독 보도합니다.

[기자]
길에서 전화하던 남성이 옆에 있던 여성에게 마구 발길질을 합니다.

벽으로 밀어붙여 주먹을 휘두르더니, 도망가려는 여자의 옷을 잡아당겨 바닥에 내동댕이칩니다.

쓰러진 여성의 얼굴을 또다시 발로 차고, 정신을 잃은 듯한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양민준 / 목격자 : 여자 분 입이 완전히 피투성이였어요. 피하게 하느라고 제 셔츠에 피 좀 많이 묻을 정도로…]

어제 (18일) 새벽 서울 신당동에서 22살 손 모 씨가 술에 취해 여자친구를 무차별 폭행한 겁니다.

손 씨는 주변에 있던 시민들이 여성을 피신시키자, 이번에는 트럭을 몰고 돌진했습니다.

만취한 남성은 트럭을 몰고 여자친구의 뒤를 쫓았습니다.

이렇게 좁은 길목을 막무가내로 지나면서 시민들이 급히 대피했고, 펜스도 완전히 망가졌습니다.

결국, 보다 못한 시민들이 직접 나서 손 씨와 추격전까지 벌인 끝에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추격한 시민 : 일단 폭력 자체가 나쁘다는 생각이 들고…. 여자가 너무 심하게 맞고 있으니까 아무도 안 도와주면 여자분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당시 손 씨의 혈중알코올농도는 면허 취소 수치에 해당하는 0.165%.

경찰 조사 결과 손 씨는 피해 여성과 1년 넘게 교제하면서 불화를 겪어온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서울 중부경찰서 관계자 : 평상시에 사이가 안 좋았던 모양이에요. 평상시에 있던 감정이 술을 한 잔 마시고 나니 폭발한 것 같다고…. 아직 피해자 조사를 못 했기 때문에…]

경찰은 손 씨를 특수폭행과 음주운전 등의 혐의로 입건하고, 범행 동기 등을 조사하는 대로 구속영장을 신청할 방침입니다.

YTN 신지원[ jiwonsh @ ytn . co . kr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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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못된놈 중에 못난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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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5 마지막 투구에서 위에 있는 빨간색 스톤보다 안쪽으로 안착해 2점 얻을거 1점 더 확보하여 3점 획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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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7 여섯번째 투구에서 빨간색 스톤 가드 두개를 걷어내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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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9 다섯번째 투구에서 완벽히 빨간색 스톤 두개을 걷어내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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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9 마지막 투구에서 걷어내 3점 획득.



여기서 합계스코어 11대 6으로 일본팀은 마지막 END10를 진행하지 않고 기권하여(END당 8개 스톤을 사용하므로 역전하려면 이론적으로 6개를 원 안에 넣어야 되는 상황이라 포기) 우승.

그래서 그 사람이 스스로 만족하고 팀에 기여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해야 조직이 잘 굴러간다. 음악은 인류가 이해할 수 없는 더 높은 인식의 세계로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끄는 영적인 출입구이다. 고맙다는 인사를 몇번이나 하고 리어카를 끌고 어데론가 바쁘게 가시는 허리굽은 그 할머니의 뒷모습... 그렇게 세월이 흘렀습니다. 누구나 사는 모습은 비슷하지만 열심히 사는 모습은 세상 누구보다 최고인 똑순이 누나, 나의 누이야! "나는 말주변이 없어"하는 말은 "나는 무식한 사람이다","둔한 사람이다"하는 소리다. 오늘 여자 컬링 우승 결승전 하이라이트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희망이란 삶에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오늘 여자 컬링 우승 결승전 하이라이트 사실 자신을 괴롭히는 것은 결과물보다 너의 '상상'이다. 아파트 주변에도 이름 모를 새들이 조석으로 찾아와 조잘댄다. 오늘 여자 컬링 우승 결승전 하이라이트 코끼리가 역경에 처했을 때는 개구리조차도 코끼리를 걷어 차 버리려 한다. 리더는 자기의 장단점을 정확히 알고 자기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친구가 어려움에 처했을때,최선의 정성을 다하여 마치 나의 일처럼 돌봐 주는 일. 오늘 여자 컬링 우승 결승전 하이라이트 네 꿈은 반드시 네 꿈이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꿈이 네 것이 될 수는 없어. 오늘 여자 컬링 우승 결승전 하이라이트 열망이야말로 어떤 운동 선수의 성공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다. 그들은 한번의 실패로 포기하지 않는다. ​정신적으로 강한 사람은 실패를 포기의 이유로 보지 않는다.
 

2015 UEFA U-21 챔피언쉽 예선 플레이오프 2차전

프랑스 U-21 VS 스웨덴 U-21

 

참고로 1차전은 프랑스가 2-0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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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봐도 프랑스가 유리한 상황이었으나

홈에서 스웨덴이 3골이나 처넣으면서 진출 직전

(총합스코어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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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꾸역골 처넣으면서 다시 앞서가는 프랑스

그와중에 쿠르자와 인성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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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로보니 진심 개빡쳤을듯 ㅋㅋㅋㅋ

(총합스코어 3-3 / 이대로 끝나면 원정다득점으로 프랑스가 진출) 

 

그런데 1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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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ㅋㅋㅋ

(총합스코어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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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보소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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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정의구현으로 스웨덴이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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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고도 단체농락

세레머니로 도발하다 역관광 그래서 그 사람이 스스로 만족하고 팀에 기여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해야 조직이 잘 굴러간다. 세레머니로 도발하다 역관광 음악은 인류가 이해할 수 없는 더 높은 인식의 세계로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끄는 영적인 출입구이다. 고맙다는 인사를 몇번이나 하고 리어카를 끌고 어데론가 바쁘게 가시는 허리굽은 그 할머니의 뒷모습... 세레머니로 도발하다 역관광 그렇게 세월이 흘렀습니다. 누구나 사는 모습은 비슷하지만 열심히 사는 모습은 세상 누구보다 최고인 똑순이 누나, 나의 누이야! "나는 말주변이 없어"하는 말은 "나는 무식한 사람이다","둔한 사람이다"하는 소리다.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세레머니로 도발하다 역관광 희망이란 삶에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사실 자신을 괴롭히는 것은 결과물보다 너의 '상상'이다. 아파트 주변에도 이름 모를 새들이 조석으로 찾아와 조잘댄다. 코끼리가 역경에 처했을 때는 개구리조차도 코끼리를 걷어 차 버리려 한다. 세레머니로 도발하다 역관광 리더는 자기의 장단점을 정확히 알고 자기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세레머니로 도발하다 역관광 친구가 어려움에 처했을때,최선의 정성을 다하여 마치 나의 일처럼 돌봐 주는 일. 세레머니로 도발하다 역관광 네 꿈은 반드시 네 꿈이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꿈이 네 것이 될 수는 없어. 열망이야말로 어떤 운동 선수의 성공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다. 그들은 한번의 실패로 포기하지 않는다. ​정신적으로 강한 사람은 실패를 포기의 이유로 보지 않는다. 세레머니로 도발하다 역관광 화는 나와 타인과의 관계를 고통스럽게 하며, 인생의 많은 문을 닫히게 한다. 세레머니로 도발하다 역관광 단순한 선함이 아니라 목적있는 선함을 가져라. 이사람은 마침내 전세계의 생활 패턴을 바꾼 희대의 걸작물을 탄생시킨 스티브 잡스 입니다. 세레머니로 도발하다 역관광 멀리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오히려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항상 사랑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어떤 젊은 유대인 부부가 아이를 낳자마자 업둥이를 하였습니다. 그 이후 그는 내면적 자아로 부터 해방 되었습니다. 달리기를 한 후 샤워를 끝내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세레머니로 도발하다 역관광 내겐........친구들이 곁에있다...아주 소중하고 우정을 나눈 친구들이...사람들은 연인끼리,가족끼리만 사랑하는줄안다... 세레머니로 도발하다 역관광 훌륭한 위인들의 이야기도 많이 해주셨습니다.
 
단체샷단체샷단체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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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 사람이 스스로 만족하고 팀에 기여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해야 조직이 잘 굴러간다. 단체샷 음악은 인류가 이해할 수 없는 더 높은 인식의 세계로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끄는 영적인 출입구이다. 단체샷 고맙다는 인사를 몇번이나 하고 리어카를 끌고 어데론가 바쁘게 가시는 허리굽은 그 할머니의 뒷모습... 단체샷 그렇게 세월이 흘렀습니다. 누구나 사는 모습은 비슷하지만 열심히 사는 모습은 세상 누구보다 최고인 똑순이 누나, 나의 누이야! "나는 말주변이 없어"하는 말은 "나는 무식한 사람이다","둔한 사람이다"하는 소리다. 단체샷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단체샷 희망이란 삶에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단체샷 사실 자신을 괴롭히는 것은 결과물보다 너의 '상상'이다. 단체샷 아파트 주변에도 이름 모를 새들이 조석으로 찾아와 조잘댄다. 단체샷 코끼리가 역경에 처했을 때는 개구리조차도 코끼리를 걷어 차 버리려 한다.
 
- 삶에 대한 태도와 원칙은 무엇입니까?

제가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정직, 성실 그리고 끊임없이 공부하는 자세,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단어로만 봤을 때 얼핏 구태의연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 세 가지를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죠?

분명한 것은 이러한 개인적인 가치관들이 CEO로서의 행동기준과 경영철학의 근간이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가치관은 우리 회사의 핵심가치 속에도 녹아 들어 있습니다. 즉, 정직은 고객과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것에, 성실은 세 가지 핵심가치 모두에, 공부하는 자세는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 노력한다는 것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이러한 가치관을 뿌리로 해 제게는 또한 ‘삶의 원칙’과 ‘판단 기준’이라는 현실적 줄기가 있습니다. 살아가는 동안 중심을 잡아줄 삶의 원칙은 내 자신에게만 적용하는 것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적용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자신이 스스로 지키고자 하는 ‘삶의 원칙’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아요.

첫째,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둘째, 높은 목표를 세우고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셋째,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넷째, 스스로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으며, 외부 평가에 연연하지 않는다.
다섯째, 항상 자신이 모자라다고 생각하며, 조그만 성공에 만족하지 않으며, 방심을 경계한다.
여섯째, 기본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일곱째, 천 마디 말보다 하나의 행동이 더 값지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키고자 하는 삶의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나이, 성별, 학벌 등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능력이다.
둘째,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고, 각자의 다양성을 인정한다.
셋째, ‘너는 누구보다 못하다’는 식으로 다른 사람끼리 비교하지 않는다.
넷째, 다른 사람을 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이용하지 않는다.
다섯째, 내 스타일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삶의 원칙 못지않게 ‘판단 기준’ 또한 그 사람의 삶에 있어 무척 중요하죠. 판단기준에 의해 선택을 하게 되고 그러한 선택들 하나하나가 인생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니까요. 어떤 판단을 해야 할 때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기준으로 결정을 합니다.

첫째 기준은 원칙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매사가 순조롭고 편안할 때는 누구나 원칙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원칙을 원칙이게 만드는 힘은 어려운 상황, 손해를 볼 것이 뻔한 상황에서도 지켜냄으로써 생겨난다고 생각합니다. 그처럼 힘든 상황 하에서도 원칙을 지켜간다면, 언젠가는 큰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둘째 기준은 본질에 충실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 판단을 내려야 할 때 그 사안에 대해 여러 가지 선택이 주어질 경우가 있는데, 본질과 직접 관련이 없는 것은 제외하고 본질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들만 고려해서 판단을 내린다면 옳은 결정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돈, 명예, 주위의 평판 등은 본질이라기보다는 열심히 노력한 후에 얻을 수 있는 결과이기 때문에, 판단을 할 때 고려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과에 해당하는 것들을 제외하고 나면 고려해야 할 점들이 훨씬 단순해져서 올바른 판단에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는 것이죠.

제가 판단기준으로 삼는 셋째 기준은 장기적인 시각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단기적인 이익이나 승부에 집착하다 보면 당장에는 작은 이익을 볼 수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생각합니다. 눈앞의 순간적인 이익에 연연하기보다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옳은 쪽으로 판단하고 차근차근 일을 진척시켜 나가는 것이야말로 결국 참된 성공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어요. 성공이라는 것의 본질 자체가 단기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처음 회사를 만들 때부터 지금까지, 저는 변함없이 제 자신, 개인보다 전체 조직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 자체가 사람들이 모인 조직을 이끄는 리더라면 조직의 크기와 상관없이 필수적으로 가져야 하는 생각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단언하건대, 전체가 잘될 수 있다면 나는 개인적인 이해타산과 상관없이 어떠한 선택도 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말로만 이야기하기 보다는 실제로 행동으로 보여준 때도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한 행동들 중에는 외부에서 보기에는 놀라운 선택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그 모든 선택들은 나 나름대로의 기준에서 우리 모두가 잘될 수 있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었죠. 그런 마음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 그렇다면 본인이 생각하는 성공이란 무엇입니까?

제 인생의 성공의 정의는 ‘삶의 흔적을 남기는 것’입니다. 영어 표현으로는 ‘Make a difference’하고 싶네요. 내가 죽고 나서도, 내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때와는 다른 것이 이 세상에 남았으면 해요. 크로마뇽인의 벽화처럼, 이름이 남아있지도 않고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의 생각의 변화나 제도, 책, 조직처럼 누군가가 있었다는 흔적이 남기를 바라는 거죠.

영화 ‘스파이더맨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With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y" 그는 파워를 원하진 않았지만 그걸 가지고 있으면 합당한 일을 해야 합니다.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열심히 공부하다보니 한 사람 두 사람, 소문 나서 사람들이 보고 있고 기대를 해 책임감도 생겼어요. 제가 원하지 않는 책임감이지만 많은 사람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은 해선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 젊은 시절 가장 열중했던 일은 무엇입니까?

공부 양이 많았던 의대생이다보니 공부에 열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20대 시절에는 이런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개인이 사회 속에서 얻을 수 있는 여러 이익들이 결코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선조로부터 내려온 지혜와 동시대에 산업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시는 분들의 노력이 모여서 만들어진 것인데, 당시 저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주어진 공부만 성실히 해내면 그러한 혜택들을 비교적 쉽게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회에 항상 빚진 마음이 들었고, 어떻게 하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제가 받은 혜택의 일부라도 돌려드릴 수 있을까 하는 것들이 고민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고민을 해결할 방법을 찾다가 의료봉사를 시작하게 되었는데요. 당시 구로동 공단이나 무의촌 주변에서 무료 진료를 실시하면서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역할에 대한 많은 생각들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들이 나중에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프로그램을 무료로 배포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생각의 기초가 된 것 같습니다.

- 젊은 날에 지녔던 초심을 일관되게 지켜왔다고 생각하십니까?

살아가면서 내 스스로가 만든 삶의 원칙들을 100% 지켜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늘 충실히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또한 앞서 이야기했듯 제 판단 기준 첫 번째는 ‘원칙을 지킨다’ 입니다. 물론 어려운 상황도 많았지만 오히려 이러한 상황이 원칙이 더 필요한 순간이죠. 힘든 상황, 손해 볼 것이 뻔한 상황 하에서도 원칙을 지켜간다면, 그것이 언젠가는 큰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고 믿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 자신이 가장 자랑스러웠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처음 백신을 개발한 후 의대 교수로서, 군의관으로서 일하며 틈틈이 시간을 쪼개 백신 개발을 계속했습니다. 박사 학위를 받고 군의관 복무를 마친 뒤에 컴퓨터와 의학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시점이 되어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거듭된 고민을 해결해 줄 실마리는 ‘내가 이때까지 살아왔던 삶은 남이 보기 좋은 삶이었다’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풀렸습니다. 서울대 의대 졸업, 20대 의학 박사, 20대 의대 교수로 이어지던 순탄한 과정은 남이 보기에는 좋았을지 모르지만 컴퓨터를 하면서 느낄 수 있었던 자부심, 보람, 사명감, 성취감 등을 주지는 못했죠. 살아온 시간보다는 살아갈 날이 더 많은 시점에서, 지금까지 쌓아온 것에 연연하기보다는 앞으로 더 보람을 느낄 수 있고, 해 나갈 일이 많은 쪽을 선택하는 것이 올바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14년간 공부해서 박사 학위까지 받았던 의학을 포기하기로 결심하고 안철수 연구소를 설립하게 되었죠. 많은 고민을 했지만

- 자신이 가장 부끄러웠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세상에는 똑똑한 사람이 너무 많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많죠. MBA과정을 40대 중반에 밟게 됐는데 편하게 청강생이나 연구원으로 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27년 동안 공부를 했지만 마음 편하게 하는 공부는 남는 게 없더라고요. 그래서 인터뷰를 거쳐 학위과정을 선택했어요. 과제, 프로젝트, 시험 등 고생을 하며 공부할 때가 남는 것이 많기 때문이었죠.

‘No pain, no gain’ 남들은 속일 수 있어도 자신은 못 속입니다. 공부할 때 편하다고 생각하면 나에게는 위험신호에요. 회사경영만 10년 해서 많은 부분을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어떤 부분은 부끄러울 정도로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경험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부분이 있었죠.

- 본인에게 부모님이란 어떤 의미입니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말씀을 많이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신문에 난 적이 있는데 신문배달 하는 소년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무료진료를 해주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올해 여든이신 데 환자 볼 때 말고는 계속 책만 읽으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버님께선 50대 중반의 나이에 가정전문의 시험을 쳐서 합격을 하기도 하셨죠. 제가 뒤늦게 공부하러 갈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영향을 받은 것 아닌가 싶어요.

어머니께서는 저에게 늘 존댓말을 쓰셨어요. 고등학교 때, 급한 일로 택시를 타게 되어 어머니가 택시를 잡아주셨는데 차가 떠나자마자 기사가 내게 물었어요. “형수님이신가요?” 제가 어머니라고 대답하자 그는 깜짝 놀라면서 “학생은 훌륭한 어머니를 두었으니 나중에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잘 모셔야 한다.”고 했어요. 늘 듣던 말이라서 그랬는지 그날도 “다녀오세요.” 하는 말에 그냥 “예” 하고 대답했던 것인데 택시기사가 그 점을 새삼스럽게 일깨워준 것이었죠. 그런 영향으로 군 대위로 복무하던 시절에는 하급자들에게 반말이 나오지 않아 애를 먹기도 했습니다. 배려는 생활 속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어요. 제가 생각하는 배려의 모습은 이렇게 부모님께 배운 것들이죠.

저는 어릴 적부터 기계나 전자 부품 만지는 것을 무척 좋아했어요. 적성만 생각하면 공대에 가는 것도 괜찮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 제 스스로 의과 대학에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부모님이 내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말씀은 안 하시지만 의대 진학을 바라신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어요. 부모님께서 내게 얼마나 많은 것을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주셨는지를 생각하면서 그런 결정을 내렸던 것입니다.

- 인생에서 돈이란 무엇입니까?

정보보안 분야는 특히 사명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철학적으로 무장하지 않고 단순히 돈벌이로만 접근하면 사회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보안 문제는 누가 책임지고 대응할 수 있는지, 그런 조직이 있는지가 근본적인 질문이 돼야 합니다. 지난 1999년 CIH 바이러스 사태, 2003년 인터넷 대란, 2009년 디도스 공격 때 안철수연구소가 자체 인력을 투입해 혼란을 막은 바 있죠. 외국에서 엔진만 갖고 와서, 또는 돈벌이만 생각하고는 그 같은 일을 제대로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 젊은 날, 가장 힘들었던 경험은 무엇입니까?

의대 본과 일 학년 과정이 끝난 겨울 방학 때에 저는 부산에 내려가서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며 실컷 놀았습니다. 정처없이 기차를 타고 낙동강 변의 아무 역에나 내려 낚시를 하기도 하고 바둑 책이나 영화를 보면서 휴식을 취했습니다.

부산에서 길지 않은 겨울 방학을 보내고 서울에 올라가야 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동안 잘 참고 있었는데 불쑥 그런 감정이 치솟아 오른 것이죠. 도저히 서울로 갈 마음이 나질 않았습니다.

의대생들에게는 성적이 평생 지고 다닐 멍에가 됩니다. 레지던트 시험에도 학부 때의 성적이 그 중요한 지표가 돼죠. 반에서 어느 정도 이상은 되어야 자기가 원하는 과를 갈 수 있게 돼 있습니다. 대학 입시를 앞둔 수험생과도 같은 처지인 것이죠.

말하기로는 십등 안에는 들어야 자기 원하는 과를 선택할 수 있다고들 했어요. 그 등수 안에 들기 위해서 비인간적인 생활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 싫었죠.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성적을 따야 했기에 걱정이 되어 겨울 방학 끝나기 일주일 전에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미리 가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숙을 하던 방에 발을 디딘 순간 혼자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방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데 늪에 빠지는 듯한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제 주위에는 친구도 없어서 고민을 털어놓고 말할 사람도 없었어요. 더구나 부모님들은 멀리 계셨으므로 내가 어떤 생활을 하는지도 모르실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더 답답해져 왔습니다. ‘성적이 잘 나온 걸 보고 서울 생활에 잘 견디고 있는 줄로만 아시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부모와 자식 간에 공유할 수 있는 부분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실감할 수 있었어요.

아마도 그때가 내 평생 가장 어려운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마음은 점점 정처를 모르고 떠돌아 다녔어요. 방황이란 말이 처음으로 실감되었는데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느낌이라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난감하기만 했습니다. 그때 든 솔직한 심정으로는 학교에 다니기 싫었습니다. 어쩔 줄 몰라 쩔쩔 매다가 어머니께 장거리 전화를 드렸습니다. 저는 울면서 말했어요. “어머니, 공부가 너무 힘이 듭니다.”

깜짝 놀라신 어머니께서는 곧바로 비행기를 타고 올라오셨습니다. 그날로 어머니와 함께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셨어요. 기차를 타고 가는 중에도 저는 계속 울었습니다. 어머니께서 걱정하지 말라고 달래주셨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더라도 눈물부터 먼저 나왔어요.

아버지께서는 걱정스런 마음에 저를 잘 아는 정신과 의사한테 보내셨어요. 그 의사 선생님께 제 이야기를 털어놓았죠. 그러나 결국은 제가 해결해야 할 문제였습니다. 그 선생님의 이야기는 나의 고민과는 거리가 있는 조언이었죠.

선생님은 의과대학 공부만 하다 보니 시야가 너무 좁아져서 그러는 것이니까 이제는 서클에도 들고 친구도 사귀고 놀러도 다니고 그래 보라고 하셨어요. 그러나 그 길은 바로 성적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당연히 성적이 떨어지게 돼 있는데 어떻게 그 길을 택할 수 있겠어요?

부산에서 며칠을 보내고 마음을 달랜 나는 부모님의 걱정을 뒤로하며 서울에 올라왔습니다. 의과대학 생활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나에 대한 스스로의 구속과 기대를 어느 정도 풀 수 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 첫사랑이란?

의과대학 생활에 잘 적응하기 위해서 들어갔던 서클에서 내 인생을 바꾸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들어간 지 일년쯤 되어 지금의 아내가 된 한 여학생을 만났던 것이죠.

의과대학생들은 흔히 본과 이 학년 때 서클엘 많이 들어가게 됩니다. 본과 일 학년 올라갈 때는 전투를 치르는 심정으로 또는 수도자처럼 모든 속세와의 인연을 끊는 결심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돼요. 그렇게 긴장하며 살다가 일 년쯤 시간이 흐르면 대개는 그 생활에 적응하게 됩니다. 거기서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포자기나 낙오를 의미하구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흔히 성적이 나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더 깊은 고민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심하면 휴학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중상 정도의 성적을 거둔 학생들이 더 잘하고는 싶은데 몸은 따라가지 않아서 괴로워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죠.

그 여학생도 그런 적응 기간이 끝나갈 무렵인 본과 이 학년 올라갈 때 서클에 들어왔습니다. 카톨릭 신자였으므로 자연스럽게 그 서클엘 들어오게 된 모양이었습니다. 나는 그 여학생보다 한 학년이 높아서 삼 학년이 되었을 때였어요.

아내에겐 이미 고백한 이야기지만 이상하게도 처음부터 그 여학생에게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래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들어보니 그 여학생도 나에게 마음이 끌렸다고 하더군요.

진료 서클이었으므로 그 활동 내용을 놓고 우리끼리 세미나를 자주 열었습니다. 예를 들어 고혈압 환자가 있다고 치고 그 환자를 어떻게 진단하고 처치할 것인가에 대해 미리 공부해 두는 것이죠. 그런 세미나가 있을 때마다 가만히 살펴보면 그 여학생은 무척 열심히 경청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여름 진료를 가기 얼마 전의 일이었습니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 나와서 커피를 뽑아들고 혼자서 한잔 하려는데 저만치에 그 여학생이 보였습니다. 친구들과 따로 떨어져 혼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다가가서 말을 걸었어요. 가만히 보면 그 여학생은 늘 혼자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유난히 내 눈길을 더 끌었는지도 모르겠네요. 내성적인 성격이라면 누구 못지 않은 나였지만 본과 이 학년 올라가서부터는 노선을 바꿔서 남들하고 많이 어울려 다니려고 노력하던 중이었으므로 그 여학생은 아마도 나의 본성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때 나를 본 사람들은 내가 무척 활동적인 사람인 줄 알았을 거에요. 그러나 혼자 있기 좋아하는 제 본성이 어디가겠어요. 우리 두 사람은 척 보기에도 무척 닮은꼴이었어요.

같은 서클 후배였으므로 부담없이 다가가서 말을 걸었습니다. 말을 하다 보니 살아온 과정이나 좋아하는 것들이 너무도 비슷했어요. 공부하다 잠깐 쉬러 나왔던 것이 그냥 세 시간 동안 정신없이 이야기를 주고받게 되고 말았어요. 도서관 앞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서. 더구나 우리는 일 초가 아쉬운 의과대학생들이었는데도 말이죠. 하는 수 없이 다음 날을 기약했습니다. 그 뒤로도 거의 매일마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무슨 이야기가 그리 많던지 만나면 이야기가 끊어질 줄을 몰랐어요.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죠. 그러다가 그 여학생과 친해지게 되었습니다. 내 눈에는 남자도 들어오기 힘든 서울 의대에 여자가 들어와서 배겨내는 것이 장하게만 보였어요.

알고 나서 봐도 두 사람은 무척 닮은꼴이었습니다. 의과대학 다니면서 추리소설을 즐겨 읽는 것부터 시작해서 혼자서 책읽기를 좋아하며 자란 것이 우선 비슷했습니다.

두 사람의 가치관이 비슷해서였을까 우리는 서로에게 참 편한 데이트 상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의과대학생들은 일상 대화에도 의학용어가 섞인 말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동기들과 만나 이야기할 때 내 말을 잘 못 알아듣는 수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그런 말들이 불쑥 나왔기 때문이죠. 그래서 컴퓨터 쪽 사람들을 만날 때는 의도적으로 의학용어를 쓰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고 있어요. 그러나 그 여학생을 만나서는 공통 화제도 많은 데다 서로 사용하는 의학용어를 잘 이해할 수 있어서 아주 편했어요. 가족들 중에 누가 아프기라도 하면 어렵게 설명할 필요없이 말이 척척 통하곤 했죠.

의과대학교 삼 학년때는 학기제가 아닌 학년제로 학점을 주기 때문에 일년 걸 몰아서 두 달 동안 시험을 다 봅니다. 장거리 경주라서 시험 하나 끝나도 쉴 틈이 없이 곧바로 다른 과목 공부를 해야 하므로 정말로 인간의 한계를 경험할 수 있는 드문 기회라고 할 수 있어요. 저야 그 고비를 어떻게든 넘겼지만 그 여학생이 겪을 때에는 너무 안타까워 보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힘들게 레지던트 생활을 해나가는 것을 보고도 크게 도와줄 수 없어 미안했죠. 레지던트 때에는 이미 우리가 혼인을 하고 아이까지 있었던 때라 아내에게는 무리가 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나 그 지독한 과정을 무사히 다 끝내고 나서 사회 생활을 시작한 아내는 아주 사람이 달라 보였습니다. 제가 학교 생활에 잘 견디는 체질인데 반해 아내는 사회 생활 체질이었다. 늠름하게 직장을 다니며 어느 자리에서건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 있는 아내를 보면서 저는 자랑스럽기도 하고 뜻밖이라 놀라기도 했습니다. 부모님의 보호 속에서만 자라서 그런지 공부밖에 할 줄 몰랐던 저는 특히 대인 관계에서는 아내에게 배워야 할 점이 많습니다.

- 타임머신이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 가장 바꾸고 싶은 순간은 언제입니까?

후회는 하지 않는 편입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아버님을 바라보면서 나도 나이가 들면 아버님처럼 백발이 성성하고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서 살다보니 오히려 의사를 그만두어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매순간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산다면 그 이후에 할 일이 정해진다는 신념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 자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스승이 있다면 누구입니까?

‘우리는 우리가 읽은 것으로 만들어진다’는 독일의 유명한 문호 마틴 발저의 말처럼, 책은 우리 인간이 ‘어떤’ 것을 이루고 ‘무엇’인가가 되는 데 가장 유익한 길잡이라고 생각합니다. 존경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몇 사람에 한정되지 않고 다양한 관점에서 존경할 만한 사람이 많습니다. CEO로서 롤 모델 중 한 분은 인텔사의 전 CEO였던 앤디 그로브였습니다.

또한 교수로서 롤 모델 중 한 분은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의 랜 로디쉬 교수입니다. 그는 현업에서 학생들의 창업을 도와준 케이스가 몇 백 건이나 될 정도며, 마케팅 분야에서 학문적으로도 유명한 분이죠. 학생들이 제시하는 사업계획이 마음에 들면 그 자리에서 도전해보라며 격려하고 창업자금을 직접 투자하기도 하는 등 많은 사람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 내 인생에 영향을 준 책 또는 젊은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다면.

일본인 수학자 히로나카 헤이스케가 쓴 <학문의 즐거움>이란 책의 한 구절을 생활 신조로 삼고 있습니다. 그는 수학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필즈 상을 받은 바 있는 저명한 학자입니다. 그 책을 보면 한 평범한 사람이 노력을 거듭한 끝에 원래 천재였던 사람보다 더 빛나는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어요. 그 책은 제 정신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 책의 내용에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나는 미리 남보다 시간을 두세 곱절 더 투자할 각오를 한다. 그것이야말로 평범한 두뇌를 지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라는 구절을 읽었을 때에는 저의 갈 길을 한 줄기 빛이 인도하는 듯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후 남보다 더 노력하고자 했습니다. 항상 노력하고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삶은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유의할 것은 과거에는 한 사람의 천재가 다양한 일을 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점입니다. 다른 분야에 대한 상식과 포용력을 갖춰야 합니다. 자기 분야만 알고 다른 분야 사람과는 협조도 이해도 안 된다면 아무런 성과도 낼 수 없는 사람이죠.








- 마지막으로, 어떻게 살면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지 젊은 세대에게 한 말씀 들려주십시오.

현대 사회는 10년 후를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급변하고 있습니다. 10년 전 인기 있었던 직업도 현재에는 다른 직업이 각광받고 있죠. 그렇기 때문에, 어린 시절에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대한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나름대로 방향을 잡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조언 여섯 가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자신에게는 엄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실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엄하기 쉬운 것이 인지상정이지 않겠어요? 그렇지만 어떻게 보면 그런 태도가 많은 사람들이 발전 없이 제자리에만 머무르게 하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둘째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히 다른 사람의 내적인 능력과의 비교가 아닌, 외적인 모습만의 비교는 삶을 불행하게 할 뿐입니다. 세상에는 잘난 사람이 많죠. 말 잘 하는 사람, 재산이 많은 사람, 그리고 지위가 높은 사람, 이렇게 외적으로 보이는 모습들은 일종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내적인 능력과 비교하는 것은 자신의 발전에 자극이 될 수도 있지만, 결과로 나타나는 외적인 부분들만 가지고 비교를 한다면 여러 가지 부작용이 생길 수 있습니다. 특히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라 같이 일하는 주변 사람들의 외적인 모습과 비교하는 것은 불행한 삶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매사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살라’입니다.
긍정적인 시각으로 사물과 현상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스스로가 즐거울 뿐만 아니라 주변까지 밝게 만듭니다. 반면에 부정적이고 방어적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나 주변 상황에 대해서 불평하고 절망하면서 주위 사람들을 긴장시키고 조직 전체에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외부적인 환경이 나쁘다고 해서 그 환경을 탓하고 불평하는 것만으로는 상황을 바꿀 수도 없을 뿐더러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극복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주어진 일에도 최선을 다하지 않다보면, 결국 자기 인생만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죠. 따라서 부정적이고 방어적으로 살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바꾸거나 환경을 바꾸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러한 삶이 가치 있는 삶입니다.

넷째는 ‘매순간을 열심히 살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매 순간 어려움에 닥쳤을 때, 쉽게 포기하기보다는 바로 지금이, 내 한계를 시험하는 순간이라는 마음으로 노력하는 것이 중요해요. 쉽게 포기해버린다면 바로 거기가 자신의 인생에서 평생 다시는 넘지 못할 한계가 되는 것이죠. 매 순간이 자신의 한계를 만들어가는 때라는 것을 명심하고, 스스로의 한계를 높이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다섯째, ‘미래의 계획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30대, 40대, 50대, 60대의 모습을 스스로 그려보세요.
‘계획 없는 삶은 꿈이 없는 삶이고, 꿈이 없는 삶은 불행한 삶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꿈이라는 것은 꿈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떠한 꿈이 이루어질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생에 방향성을 제시함으로써 활력을 주고 발전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 꿈이 가지는 의미에요. 그리고 만약 노력 끝에 현실로 이루어질 수 있다면 더욱 좋은 게 아니겠습니까.

여섯째는 ‘각자 자신에게 맞는 삶의 철학, 즉 원칙을 가져라’는 것입니다.
원칙을 정하는 것이 엄청난 일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고 그 삶 속에서, 행동에서 일관성을 찾으면 그것이 바로 자기 나름대로의 삶의 원칙이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일관성을 인식하는 것이죠. 스스로 인식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무게중심이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완벽한 원칙을 세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습니다. 실천해 나가면서 수정하고 보강해나가면 되기 때문이죠. 반면에 그런 원칙조차 없다면 삶을 살아가는 동안 흔들리고 우왕좌왕하다가 좌절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습니다. 보통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시련을 이겨내는 힘이 크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종교에는 나름대로의 가이드라인, 원칙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경영하는 CEO로서 인생의 원칙을 하나하나 정립하고 만들어간다면 그 삶은 의미 있는 삶이 될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원칙을 가지고 스스로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힘들 수는 있더라도 결코 불행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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