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특별한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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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꼬드라꼬레의 10주년 기념 한불친선공연 ‘축하 CELEBRATION’에서
       왼쪽부터 이병현 유네스코 대사, 에꼬드라꼬레의 이미아 대표, 의장대 남성합창단의 악단장인 오로르 틸락 중령



 10 13() 1945분 파리 마들렌 성당에서 에꼬드라꼬레(대표 : 이미아)의 열번째 한불친선 공연 ‘축하 CELEBRATION’가 있었다. 10년째 가을이 무르익어갈 이 맘때 한불친선공연을 개최해오고 있는 협회, ’한국의 메아리(Echos dela Corée)’ 2001년 이래로 한국과 프랑스간의 문화 교류 행사를 조직해오고있다. 이미아 대표는 2001년 사명감에 사로잡혀 대학강단을 팽개치고 나와서 설립한 문화예술단체가 바로 ‘한국의 메아리(한불문화교류협회)’다.이후, 여러가지 문화예술행사들을 진행해 오다가, 2008년 부터 매년 한해도 거르지 않고 개최해 온 마들렌 성당 ‘한불친선콘서트’가 올해로 열돌을 맞았다. 이미아 대표는 가을을 너무 좋아해서 ‘풍성한 수확의 계절’ 가을에 첫 연주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번 10회 한불친선공연은 한국의 메아리(에꼬드라꼬레)가 주최했고, 프랑스 내무부와 유네스코 본부가 후원했으며, 현대자동차 프랑스, 아시아나 항공 파리지점이 협찬했다.

올해는 1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프랑스 ‘오로르 틸락 Aurore TILLAC 중령이 이끄는 ‘의장대 남성합창단’, 마르세이유 ‘오페라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악장인 김다민 씨와 현악 12인으로 구성된 ‘앙상블 메아리’, 이승민 씨가 이끄는 15인의 중창단 ‘선한’이 공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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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트릭 보두앙 프랑스한국전참전협회 회장에게 이병현 유네스코 대사와 이미아 대표가 감사패 전달


10월의 화창한 둘째주 금요일, 해가 넘어가는 어스름할 무렵, 에꼬드라꼬레의 10주년 기념 한불 친선공연이 열릴 파리 마들렌 성당 앞은 공연에 참석하는 이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이미아 대표는 이번 축하 행사에서는 진정한 ‘한불친선’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되새기는 ‘특별순서’가 준비되어 있다고만 하고, 사전에 밝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공연장에 들어서면서 알수 있었다. 앞자리는 한국전에 참전한 프랑스 용사들과 그 가족들의 자리로 예약되어 있었고,  프랑스한국전참전협회 관계자들이 참석해 있었다.

김다빈 씨가 이끄는 현악 12인의 ‘앙상블 메아리의 공연부터 시작되었다. 현악기의 아름다운 선율이 1천 석이 가득 메워진 마들렌 성당 안에 가득 울려퍼졌다.


한국전 참전 프랑스 용사들에게 바치는 감사의 공연

10주년 특별순서로 한국전 참전 프랑스 용사들에게 바치는 감사의 세리머니가 있었다. 1부 공연이 끝나고 이병현 유네스코대사는 축사에서, 매년 한불친선 공연을 개최해 온 에꼬드라꼬레의 이미아 대표에게 감사하다고 하면서,이번 10주년 공연은 특별히 한국전 참전 프랑스 용사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또 그들의 희생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과거의 전쟁으로 인한 슬픔과 유감을 꼭 기억해야한다고 했다. 그는 이번 공연이 세계 평화의 큰 메시지를 전하는 기회라고 했다. 이어 이병현 대사는 이미아 대표와 함께 프랑스한국전참전협회의 파트릭 보두앙 회장에게 감사패와 287명의 전사자들의 이름을 새긴 사명록을 전달했다.

파트릭 보두앙 회장은 인삿말에서 한국전에 참전한 프랑스 군인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3421명이 자원으로 참전해서 287명이 전사하고, 1008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한국전에 참전한 것을 자부하고 있고, 그들은 나치에 저항했던 이들이었으며, 특히 자유와 정의를 기원하던 젊은 프랑스인들이었다고 강조했다. 또 그들은 군인 박애정신을 떠나서 한국의 관습과 전통, 사람들,그리고 그들의 희망을 알게 되었다고 하면서 한반도의 평화를 기원했다.


평화를 기원한 공연

이어진 2부 순서로는 프랑스 ‘오로르 틸락 Aurore TILLAC 중령이 이끄는 ‘의장대 남성합창단과 이승민 씨가 이끄는 15인의 중창단‘선한’이 공연했다. ‘선한공연에서는 솔로로 우리의 가락인 민요를 열창했고, 거기에 맞추어 한국 춤을 선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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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연 마지막에 모두 기립한 채 <할렐루야> 연주를 듣고 있다

마지막에는 공연한 팀들이 함께 <넬라판타지아>,<어메이징 그레이스>, <할렐루야>를 연주하며 열창했다. <할렐루야>가 울려퍼질때는 모두 기립했다. 이미아 대표는 이날 밤 공연에서 평화를 강조했다. 이날 마들렌 성당을 가득 채운 이들의 마음속에 평화의 메세지가 전달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 동안 파리의 전통있는 마들렌 성당에서 매년 한불친선 공연을 한다는건 쉽지만은 않았으리라 짐작이된다. 이미아 대표의 열한 번째 이야기는 마들렌 성당이 아닌 다른 곳에서 쓰여질 예정이라고 하는데, 사뭇 기대가 된다.    

                                                                                                                                               

                                                                                                                                      <파리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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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음시식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던 K-Mart(케이마트) 파리 15구 샤를르 미셀 점

9 29일에서 10 8일까지 파리 K-Mar(케이마트) 오페라 점와 15구 샤를르 미셀점에서 농협, 한국산 농식품 판촉행사가 있었다. 파리 15구 샤를르 미셀 점에서는 시음 시식행사, 그리고 오페라 점에서는 판촉이 진행되었다.

10 4일 수요일 추석,  시음시식 행사가 열리고 있는 파리 15구 케이마트 샤를리 미셀 점에 갔다. 어쩌면 추석이라 더욱 발걸음이 그쪽으로 이끌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외국에서 맞이하는 우리 명절은, 항상 그렇듯이 일상의 하루일 뿐이다. 이번에는 10일간 계속되는 추석 황금연휴라고들 하는데, 왠지 남의 집 잔치 같기만 하다. 함께 할수 없어 아쉬운 마음만 가득했다.

15구 케이마트에 들어서자마자 시음시식 행사판이 펼쳐져 있고, 각종 차를 시음해볼수 있는 작은 컵들이 즐비하고, 한쪽에는 알이 꽉 들어찬 포도가 있었으며, 시식해 볼 수 있게 한알씩 작은 오목한 종이접시에 담겨져있다. 진행요원인듯한 이는 연신 뜨거운 물을 가져와 차를 우려내고 있었다.

시음시식 판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어떤 프랑스 젊은이가 꿀에 절은 차를 사겠다며 선뜻 집어가고 있었고, 어떤 프랑스 중년 남성은 진행요원이 권하는 차를 맛보며 차에 대해 물어보고 있었다. 

 

시음 시식에는 프랑스인들의 호응이 많아

우리 한인들은 맛을 아니까 필요한 것만 구매하고 있고, 우리 차나 식품의 맛을 모르는 프랑스인들이 시음 시식을 비교적 많이 해보고 있다고 진행요원은 이야기한다. 특히 향이 진한 두충차와 감잎차 같은 경우에는 카페인이 없어 저녁에 마실 수 있고, 고혈압에  좋아 혈압있는 프랑스 할머니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꿀에 절은 모과, 생강,유자차는 프랑스인들은 쨈이냐고 물어와 진행요원이 설명을 해주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꿀에 절은 생강이 제일 잘나간다고 한다. 아마 날씨가 추워져서 생강이 몸을 덥혀주기 때문인 듯하다. 그리고 미숫가루가 곡물을 간 것이라서 인기가 있었다.

포도는 한국인이 좋아했고, 프랑스인들은 한국 포도를 맛보고는 발효한 것이냐고 물어왔다고 했다고 하길래, 한 알을 시식해 보았는데 감탄이 나왔다. 왜 프랑스인이 ‘발효’를 운운했는지 알것 같은 시큼한 맛에 잠시 소스라쳤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한국의 포도 맛이었고, 바로 어린 시절 한국에서 포도농장에 가서 맛보았던 그 맛이었으며, 거기에는 그때  함께 했던 이들과의 추억과 향수가 진하게 깃들여져 있었다. 포도 한알이 몇십년 전의 기억을 거스릴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고, 그동안 프랑스 포도 맛에 길들여져 있어서, 한국과 프랑스의 포도 맛이 그렇게 다른 줄은 모르고 있었다. 촘촘하게 알이 박혀있는 포도 송이는 탐스러워 보였다.

차를 시음해 보고 프랑스인들, 시음시식 판에 있는 국수를 가져가도 되냐고 묻는 한인주부들,그리고 파리에 있는 딸 집에 다니러 왔다는 한인 노부부는 관심을 가지고 시음시식 코너를 둘러보고 있었다. 진행요원은 추석이라 쌀가루와 찹쌀가루도 많이 팔렸다고 한다.

돌아오는 길에, ‘파리 한인들의 삶은 예전에 비하자면 정말 편하고 좋아졌다’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었다. 이렇게 바로 한국산 농식품을 맛볼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 90년대 유학생 시절, 파리의 한국마트가 한 두개 정도 있었을때, 중국식품점에서 파는 캔에 든 김치 사서 참치 넣어 끓여서는 유학생들끼리 모여서 함께 나누어 먹을 때가 있었다. 캔에 든 김치가 얼마나 제대로 된 김치 맛이었겠나만은, 그때 그건 우리에게 최고의 음식이었다. 그때 먹었던 참치김치찌개는 단순한 음식이라기 보다는 힘들고 고달팠던 유학생들의 위안이었다. 그리고 한번씩 미치도록 한국음식이 그리워지곤 했던 적이 있었다.

                                                                                                                                                                                         

                                                                                                                                  <파리지성>   

 

                                "이응노의 작품이 젊어지고 있다" 

                                           - 퐁피두 센터,  체르누스키 미술관, 테싸 해롤드 화랑 전시

                                                                                                                                                            chae.JPG

                                                                                                      최옥경 (Okyang Chae-Duporge  이날코  한국 미술사 교수 )   


2017년은 과히 프랑스에서 이응노의 해라고 할 만하다. 지난 920일부터  퐁피두 센터 5층에서 Donation Lee Ung-no 전시가 오픈했다. 부인 박인경 여사와 아들 이융세 작가에 의해 기증된 회화 13점과 조각 3 ,그리고 몇몇 전시 카탈로그와 사진들이 선보인다. 거장 마티스의 수작들이 줄줄이 있는 전시실 바로 건너편에 이응노의 작품들이 조금도 위축됨이 없이 자신만의 고유한 양식을 드러내며 한 방 가득 전시된 것을 보면 감회가 새롭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지난 6월부터 열리고 있는 체르누스키 동양시립미술관 전시 LEE Ungno – Hommes des  foules 카탈로그 집필에 참여하면서 작년 가을부터 이응노 작가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Vaux-sur-Seine에 인터뷰를 하러 여러 번 가게 되었다. 이융세 작가가 아카이브에서 이응노의 작품들을 하나 하나씩 보여줬을 때 새삼 작품들의 다양한 면모에 놀랐고 특히 군중 시리즈 중의 1986-87년의 몇 작품들을 보았을 때는 헉하고 숨을 죽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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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는 1958 12월 한국을 떠나 1년의 독일 체류 후 1959 12월 부터 프랑스에 정착했고, 1989년 파리에서 눈을 감기까지 예술 인생의 절정을 바로 이 곳 프랑스에서 보냈다. 한국 미술사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그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의 작품들의 다양한 면모는 많이 소개되지 않았다. 북한의 스파이라는 부당한 누명으로 1967년 납치되어 2년 반 동안이나 투옥되었고 70년대 말부터 고국에서 오랫동안 작품 판매가 금지되는 수난을 겪은 것과도 관계가 있다

다행히 한국에서는 2007년 개관된 대전 이응노 미술관이 체계적으로 아카이브 정리를 하면서 그의 작품세계의 다양한 양상이 공개되고 있지만 그가 30여년 이상 자리잡았던 프랑스의 경우에는 상황이 달랐다. 현재 퐁피두 전시실 비트린에는 1989년 작가가 운명했을때 열렸던 체르누스키 미술관에서의 전시 팜플렛이 소개되고 있는데, 현재 같은 미술관에서 지금 열리고 있는 전시는 30여년만인 셈이다. 그런 상황에서 체르누스키 미술관 (11 19일까지) 만이 아니라, 퐁피두 센터 (11 24일까지) 그리고 테싸 해롤드 화랑에서도( 10 21일까지) La Danse des signes – Ungno Lee, GeorgesNoël, Mark Tobey 전이 열리고 있는데다, 부인 박인경 여사와 아들이융세 작가의 작품도 체르누스키 미술관의 일부 전시실에 소개되고 있어서( 2018 1 7일까지) 마치 파리 곳곳에서 이응노의 불꽃놀이를보는 듯하다.  놓치지 말아야 할 전시들이다.   


모던에의 의지 

이응노가 한국을 떠난 1950년대 후반에는 한국 전쟁 이후 한국 작가들의 해외 진출이 두드러진 시기였다. 일제 식민지 하에서 일본 유학을 통해 일본화된 유럽 미술을 봐 왔던 한국 작가들에게 일본을 거치지 않고 직접 파리로 가서 유럽 미술을 체험하는 것은 공통된 깊은 갈망이었다. 50년대 말 남관, 이성자,김환기, 문신 등이 그 뒤를 이어 1960년대 초반에 한묵, 정상화, 김기린, 김창열, 방혜자 등이 파리로 떠나왔는데, 그 중 유일하게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동양화를 공부한 사람이 이응노였다

이렇듯 동양화로 시작한 작가임에도 그의 예술 여정을 돌아보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가 모던에의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가 젊은 시절 충청도 홍성을 떠나 김규진에게서 동양화를 배우려고 서울에 온 것도, 선전(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과 여러 번 입선을 거쳤음에도 30대에 일본으로 가서 일본화와 서양화 기법을 공부한 것도, 45년 한국으로 돌아온 후 55세라는 늦은 나이에 박인경 여사와 어린 아들 융세를 데리고 도불한  것도 바로 이런 그의 의지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62년 파리 폴 파케티 Paul Facchetti 화랑에서의 이응노 파리 첫 개인전은 꼴라주만으로 구성되었는데 이것은 "근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지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이응노)던 그의 확연한 자세의 귀결점이었던 것이다.


꼴라주

꼴라주는 60년대 초에 결코 새로운 테크닉이 아니었지만 동양화 스승 밑에서  대나무 그림을 그리던 이응노를, 거의 예순이 다 되어가는 그를 생각하면 대단히 파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 퐁피두에 전시된 1956년의 세 작품이 보여주듯 그는 도불 이전에 이미 풍경을 모티브로 한 반추상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해저 Fond marins (1956)는 다소 칸딘스키 작품을 연상시키지만 종이 위에 먹과 색으로 그려진 그림이고, 수직적 작품포맷과 왼쪽 하단에 수직으로 쓴 한자 사인과 낙관은 여전히 동양화를 상기시킨다. 이 시기 그의 작품들에서는 흔히 잭슨 폴록 Jackson Pollock의 드리핑이나, 마크 토비 MarkTobey의 작품들의 성향을 발견하는데 (테싸 해롤드 화랑 전시에서 이응노와 마크토비를 같이 전시한 것은 이런 맥락이다), 이들은 그당시 일본이나 한국뿐 아니라 앵포르멜 미술이 성행하던 유럽에서도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있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응노는 1952년 폴록을 처음으로 프랑스에 소개한 파케티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게된다.  이곳은 프랑스 앵포르멜 미술을 주도했던 미셸 타피에 MichelTapié 50년대초 아트 디렉터로 일을 했던 곳으로, 조르주 마튜 Georges Mathieu가 관객들 앞에서 한 두 시간 안에 대작을 그리는 퍼포먼스를 하는 등 그야말로 앵포르멜 미술의 온상이었다. 그런 곳에서 정확히 십년 후 한국 작가, 그것도 동양화를 하던 이응노가 개인전을 하게 된 것은 역사적인 의미가 깊은 일이다. 박인경여사가 필자에게 한 증언(2017 1 12)에 따르면 60년대초 파리 근교 아니에르 Anières에서 체류하고 있었을 때 폴 파케티가 찾아와 이응노가 하고 있던 꼴라주 작품을 하도록 많이 부추겼다고 한다. 그것은 이응노의 꼴라주가 엥포르멜 미술에서 보이던 강한 텍스추어를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꼴라주라고 하지만 종이만을 부쳤으니 실은 파피에 꼴레 papier collé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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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퐁피두 센터 이응노 전시
     


1962년 파케티 화랑에 전시된 이응노의 역동적인 콜라주 작품들은 제법잘 알려져 있는 편이다 (그때 나온 흑백 카탈로그도 퐁피두에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번 퐁피두 전시에서 1960년에 제작된 두 점의 꼴라주 작품은 일반적으로 소개되는 역동적인 구성의 꼴라주 작품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특히 수많은 별들이 쏟아지는 듯한 강렬한 수직 구성의 ‘’무제 Sans titre (1960)’’ 앞에 서면  패기를 가지고 프랑스에 정착한 1960년의 이응노를 바로 앞에 마주한 듯한 느낌마저 든다.  

그 이후 60년대 중반에 이응노가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문자 추상인데, 그토록 현대성을 추구하던 그가 역설적이게도 한자에서, 그것도 중국 고대의 초기 문자에서 작품 모티브를 찾은 것은 의외다. 그 당시 철학계에서 가진 기호에 대한 관심은 미술에서도 반향을 불러일으켜, 자오우기 Zao Wou-ki를 비롯한 여러 작가들이 문자에서 작품 모티브를 찾은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1959년 독일 카셀 도큐멘타 Kassel Documenta 를 보고 이응노가 동아일보에 보낸 글을 보면 그가 그 전시에서 가장 큰 인상을 받은 작가들은 당시 가장 아방가르드적인 작품을 했던 안토니오 타피에스 Antonio Tapies, 알베르토 부리 Alberto Burri, 졸탄 케메니 Zoltan Kemeny같은 이들이었고, 그이후로 이응노는 추상으로의 이행을 단행한 것만이 아니라, 이차원의 평면성을 뛰어넘으려 꼴라주마저 시작했다. 이토록 가장 아방가르드한 작가들의 경향을 쫓던 그가 한자를 모티브로 했다는 것은 나름대로 동양과 서양을 통합해 보겠다는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도 있었겠지만 한편으로는 서양에서 작업하는 동양 작가로서의 어쩔수 없는 한계를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파리동양미술학교

이응노는 항상 자신이 한국인임을 강조해왔고 서양에는 서양미술을 배우기 위해온 것이 아니라 동양 미술을 가르치려고 왔다고 역설했다. 이런 마음 자세 탓인지 그는 언어 소통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가는 곳마다 동양화를 가르쳤다. 짧은 체류기간에도 독일 본의 한국 대사관에서 동양화 수업을 했고, 무엇보다 1964년 파리 체르누스키시립 미술관에  동양미술학교 l’Académiede peinture orientale de Paris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 학교는 당시 현대미술에서 그 어느때보다도 강렬했던 동양화에 대한 호기심이나 갈망의 구심점과 해소점이 되었다. 이때 프랑스의 각계 인사들 14명 중 화가인 한스 아르뚱 Hans Hartung이나 피에르 술라주 Pierre Soulages, 후지타 추구하루 Fujita Tsuguharu, 구미 스가이KumiSugai, 자오 우기 Zao Wou–Ki 같은 화가들이 이 학교 설립을 옹호했으며 특히 이들 중 여러 명이 이응노가 1967년 느닷없이 한국에서 옥고를 치루게 되었을 때, 그를 도와주려는 서명 운동에 참여를 했다. 종형을 선고받았던 이응노는 결국 이 년 반만에 풀려나게 되는데, 최근 필자는 그 당시 부당하게 구속된 예술인들을 구하려고 실제로 발벗고 뛴 인물들을 만나게 되었다. 바로 르 구리에렉 Le Gouriérec부부다. 이들은 한국인들이 풀려나도록 프랑스 정부와 종교계에 끊임없는 호소를하고 개인 비용까지 들여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에 갔을 뿐 아니라, 투옥된 한국 친구의 딸을 보호하기 위해 결국 그 딸을 입양해서 자신들의 다른 세 아이와 같이 키운 놀라운 프랑스인 부부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차후 더 자세한 연구를 하겠지만 역사를 실제로 움직인 것은 무대 뒤의 이러한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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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르누스키 동양시립미술관 이응노 전시


파리 동양미술학교에서의 교육 활동은 이응노가 현대 미술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속적으로 서예나 동양화를 하게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데, 그가 꼴라주 이후로 펼치게 될 60년대 초기문자추상과 70년대 후기문자추상은 현대 미술이지만, 다 동양의 문자를 기초로 한 것이었고 80년대의 군상 시리즈는 아예 화선지 위에 먹으로 제작한 작업이라 문인화의 전통과 연결되어질수 있다. 체르누스키 미술관 전시에서 서양화와 동양화를 같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이런 맥락이다. 서양화작가 이응노와 동양화작가 이응노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술가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작품의 원천으로 쓰는 것이다.      


문자 추상

60년대 이응노의 작품들은 화면 전면에 한자 비슷한 형상들이 떠다니거나 몇 줄로 나열된 양상을 띠는데 꼴라주나 데꼴라주의 기법을 사용해, 간혹 문자들이 지워진 것처럼 아스라히 사라지는듯하다. 거기다 아교나 먹을 뿌려 곰팡이가 쓸거나 퇴색한 듯한 느낌을 자아내었다. 이응노는 풍화된 비석의 이미지에 이끌렸음을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 “우리 나라의 오래된 비석처럼 그 낡은 돌의 마티에르, 돌에 새겨진 문자 등, 오랜 세월에 걸쳐 풍우를 견디어 온 비석들의 문자는 정말 아름답습니다. 나는 그런 세계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문자에 관한 테크닉을 연구하기 시작했어요."(이응노)

필자는 이 인터뷰를 처음 읽었을때 그것을 은유적인 의미로 해석을 했었다. 그러나 현재 퐁피두나 테싸 헤롤드 화랑에 전시된 몇 작품은 그가 화폭 위에 모래를 끌어들이고 바랜듯한 색을 쓰면서 실제로 비석의 돌이 주는 질감의 효과를 자아내려 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1967년에서 1969년 사이 이응노가 투옥된 동안 작가로서 가장 괴로운 것은 작품을 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이 죽음과 같은 것이라고 술회한다. 그가 옥고를 치르는 동안 재료가 없는 상황속에서 음식물이나 포장지, 화장지 등으로 한 작품들은 작가에게 작업은 진정 생존의 양식임을 처절히 보여준다. 처음에는 종이를 구할 수가 없어서 감옥에 들여진 설교문 같은 것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는데, 그 중 서울 서대문 구치소에서 그린 것이 현재 퐁피두 자료들 가운데 전시되어 있다. 낡은 설교지에는 알아볼 수 없는 문자와 이미지들이 함께 볼펜으로 윤곽이 뚜렷하게 그려져 있는데 60년대 중반의 흐릿하고 머나먼 향수를 자극하는 그림에서 70년대의 윤곽선에 둘러싸인 모티브들의 전환이 이미 이때 시작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후 1970년대 회화에 있어서는 단순한 한글의 자모와 유사한 형상들이 점점 더 눈에 띄인다. 형태들은 급격히 도형화하여 간결하고 평면적인 형태로 전환된데다가 이 형태들은 윤곽선을 두른 정돈된 도형으로 다듬어진다. 거기다 1960년대의 어두운 색조에서 벗어나 원색이 자주 사용되어 밝고 화사한 색채들이 많아졌다. 이처럼 70년대의 작품들의 색이 강렬해지고 다소 디자인에 가까운 양상이 더해지는 것은 아마도 그가 69년 프랑스로 돌아온 후 타피스리나 세브르의 도자 등의 주문을 많이 받아 모티브를 더 단순화하고 장식성을 띠게 할 필요성을 느껴 그쪽으로 연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70년대 이후 그는 다양한 재료로 작업을 해, 10미터가 넘는 조각을 하거나, 깨진 기화로 벽화를 만들고, 양털을 붙이거나 짚을 삽입한 회화를 하는 등,옥중에서 그랬던 것처럼 재료를 불문하고 작업의 영역을 확장했다.


<군상>  

이렇게 60년대와 70년대를 이어온문자 추상 작업은 한국의 1980년 광주민주화 운동이라는 정치적 사건을 계기로 새로운 양상으로 접어든다. 처음에는 70년대 문자들처럼 테두리 윤곽선에 둘러싸인 인물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하다가 점점 화선지 위에 먹으로 신속하게 사람들의 수가 늘어난다. 이들은 어떤 경우에는 화면 위에 약간 경직되게 여러 줄의 행렬로 여기저기 서서 열 마다 동일한 동작들을 취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넘치는 생동감으로 팔을 뻗고 다리를 벌려 다이내믹한 율동감으로 "소리없는 아우성"을 치고 있다. 작가 자신이 설명하기를 : "내 그림은 추상적이지만 광주 항쟁이라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아 구상적인 요소를 담아 그림으로 나타낸것이랍니다. 광주 항쟁 및 세계 많은 사람들의 핵반대 운동에 대한 심정을 토대로 표현해 보았어요. 요즘은 점점 더 많은 수의 사람이 내 그림 화면에 등장하고 있지요. 이번에는 200호가 넘는 화폭에 수천 명 군중들의 움직임을 그려 넣었어요이제부터 나 자신 스스로 저 민중 속에 뛰어들어 여생을 보낼 생각입니다. 매일 매일 군중의 외침을 캔버스에 옮겨 내고 있지요."(이응노) 1985년의 이 고백대로 그는 마지막까지 군상 작업을 했다.       

이 군상시리즈야말로 이응노 작업의 총집적이다. 거기엔 꼴라주에서 보였던 역동성, 문자들을 닮은 인물들, 추상회화의 올오버 All-over, 문인회화에서 말하는 기운 생동, 그 모든 것들이 다 집약되어 있다. 어떤 작품에서는 그 다양한 동작을 하는 형상들뿐만이 아니라, 그려지지 않은 여백까지 환하게 열려있다. 온몸에 전율을 자아내도록 생명감으로 충만하다. 이응노는 항상 "서양의 새로운 추상적 형태의 추구와 동양화가 추구하고 있던것이 어울려 하나의 세계적인 경향으로써 서로 만나게" 될 것을 원했고, 다양한 시도를 통해 그것의 종합을 추구해왔다. 그의 염원은 군상시리즈에서 눈부시게 시각화되어있는 듯하다

드라마틱하게도 이응노는 1989년 서울 호암미술관에서 전시 오픈이 있던 날,프랑스에서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마치 김환기가 뉴욕에서 그러했듯이,이응노도 파리에서 자신의 작품 세계의 절정에서 타계했다. 역사는 계속 쓰여지고 있어서그의 군상들은 화폭 밖에서도 소리없는 아우성을 계속 치고 있고, 이응노 레지던시에 온 어느 젊은 작가에게서 전해들은 박인경 여사의 말처럼 "이응노의 작품은 젊어지고 있다".

                                                                                                                                       <끝>

 

                                              한반도의 반핵 평화를 위한 파리집회

                                         ‘’미약하지만 탈핵 평화의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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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 공화국 광장에서 있었던 “한반도 반핵 평화를 위한 파리 집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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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923() 13시부터 파리 공화국 광장에서 « 한반도 반핵 평화 파리집회 »가 있었다. 뜻을 함께 하는 파리의 한인들이 조직한 집회로, « 사드 가고 평화 오라! »라는 기치 아래, ‘’당장 한반도의 영구적인 비핵화와 평화를 원하고, 한반도의 평화를 사수하고 시민의 평화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북한과 미국의 전쟁 위협을 규탄하며 한국 정부의 주체적인 행보를 촉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주최측은 집회 당일인 9 23일은 백남기 농민의 1주기임을 상기시키면서, 추모하는의미로 검은 복장 차림으로 참석해줄 것을 당부했다.

집회가 열린 파리 공화국 광장은 2015년 샤를리 엡도사 테러와 같은 해 11월 파리 테러 이후 추모 및 집회, 시위가 장소가 되었다. 한동안 9월 날씨답지 않게 습하고 추웠던 날들이 계속되던 와중에 모처럼 화창한 날씨를 맞이한 토요일, 공화국 광장은 따스한 가을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프랑스 극좌파 정당인 엥수미즈 Insoumise의 집회를 위한 무대 설치 준비로 부산한 가운데, 광장 한켠에는 보드를 타고 있는 젊은이들과 가을 햇살을 맞고 있는 이들, 그리고 주장을 외치고자 나온 이들로 가득차 있었다.

<지금 당장 한반도의 영구적인 비핵화와 평화를 원합니다> 라는 글귀가 적힌 현수막이 드리운 가운데 한반도의 반핵 평화를 위한 파리집회가 시작되었다. 피켓 내용들을 보자면, ‘미국은 무기 장사 그만두라’,’전쟁협박 그만하고 대화로 해결’,’우리주권 존중하라등이었다. 또한 주최측은 ‘’사드가고 평화오라’’라는 문구를 앞뒤로 불어와 한글로 적어 프랑스인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집회를 준비하고 있을때 반핵에 의견을 함께 하는 프랑스인의 격려를 받기도 했다. 

집회는 최정우씨 가 진행했다. 그는 먼저 집회를 가진 이유 세가지를 들었다 : 첫번째, 북핵실험을 규탄하고, 두번째 그것을 빌미로 한반도에 계속해서 전쟁 위협을 증가시키고 있는,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이익을 얻으려는 도날드 트럼프 정부를  규탄하면서, 세번째로, 이와 동시에 남한 정부가 현재 상황에서 어디에 휩쓸리지 말고, 평화를 위해서 주체적인 행보를 보여줄 것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고 했다.

이후 그는 따라하라고 하면서, 구호를 외쳤다 :  «미국은 한반도를 볼모로, 무기 장사 그만두라!», «전쟁위협 지겹다, 휴전협정파기하고 평화협정 체결하라!», «우리 땅에 쓸모없는 사드를 가져가라!», «남북문제 참견마라, 우리가 해결한다!», « 한미동맹 중요하면 평화 주권 존중하라!», « 전쟁협박 그만두라!», «대화로 해결하자! » 등이었다.


고 백남기 농민 추모를 위한 1분 묵념

그는 경찰 물대포 폭력 진압으로 사망한 농민 백남기 씨의 1 주년이 되는 날임을 상기시키면서, 탈핵 평화 집회이기는 하지만, 농민 고 백남 기씨의 1 주기를 맞아서 함께 그분을 기리고 또 국가 폭력과 경찰 폭력을 강력히 규탄하는 시간을 갖겠다고 하면서, 백남기 농민 추모를 위한 1분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최정우 씨는 이게 시작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집회에도 오시고 준비하신 모든 분들이, 오늘 많이들 올까? 하는 그런 생각도 했는데, 사실은 오십 년 이상 지속된 문제이고 언젠가는 끝이 나야 됩니다. 계속해서 미국의 정권이 아무리 바뀌더라도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을 계속하고, 바로 지금 북핵 문제가 다시금대두되는 이 때에 우리가 이 집회를 시작하면서 탈핵 평화의 이야기를 미약하지만 시작하려고 합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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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발언 중인 프랑스 시민



최정우 씨의 한국말 진행은 김수야 씨가 바로 불어로 통역했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모이기 시작했다. « 임을 위한 행진곡 »을 최정우 씨의 기타 반주에 맞추어 함께 불렀고, ‘사드 THAAD가 무엇이냐’ 고 물어오는 프랑스인들에게 집회 참석자는 설명해주고 있었다.


프랑스인들의 호응과 참여가 높았던 집회

'자유발언'시간에는 프랑스인들의 참여가 있었다. 어떤 프랑스 남성이 나와 메가폰을 잡고 지금의 북핵 문제에 대해 거론했다. 그는 미국이 스스로 세계의 주인이라고 여기고 규제하려 든다고 했다. 북한이 핵실험을 했고, 미국을 공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미 이라크와 리비아, 시리아에서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데 북한만큼 비난을 받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는 우리가 적을 착각하지 말아야 된다고하면서, 미국에게 북한이 핵을 관리한다는 것은 남한과의 통일 가능성이 있는것이라고 했다. 그러기에 거기에는 미국의 전략이 있음을 알고 잘 이해해야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 여성은 자유발언에서,핵은 멈추어야된다고 하면서, 두 한국을 위해 함께하자고 했다. 집회를 취재하고 있던 프랑스인 기자는 프랑스에 있는 한국인들이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표현할 수 있어야 된다고 하면서, 좋은 집회라고 했다. 그는 집회에 참석한 한불 가정의 자녀를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고 하면서, 한국과 프랑스라는 두 문화를 가지고 자라고 있는 자녀들이 한국과 프랑스에 대한 포지션을 가지고 있는게 중요하다고 했다. 또 프랑스가 남한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조금 더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고 하면서, 북한과 미국 문제에 대해 프랑스 정부에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는게 유감이라고 했다.  

이날 집회에서는 많은 한인들이 참석하지는 않았으나, 핵 반대를 외치는 프랑스인들의 반응과 호응이 있었다. 자유 발언 시간에 한인들뿐만 아니라, 프랑스인들의 발언들이 있었고,그들은 한반도의 반핵 평화를 외치는 한인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였다. 집회 마지막에는 존 레논의 ‘Imagine’을 프랑스인들과 함께 불렀다. 집회 이후 참석자들은 15시부터 같은 장소에서 있은 프랑스의 “평화 운동 le Mouvement de la Paix”기관에서 주최한 « 평화를 위한 행진 En marche pour la paix » 대열에 합류해서, 현수막과 피켓을 들고 스탈린그라드 광장까지 행진했다.

                                                                                                 

                                                                                                                                        <파리지성 >

 

                     프랑스에서 한국어 교육의 산 증인, 임정원 교사

                                                        -25년간 교육 현장에서-


2014 10, 한글 서예전이 열리고 있었던 파리 퐁데자르 갤러리에서 파리 빅토르 뒤리 고등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학생들이 방문해서, 서예가들의 서예 시범을 보고,  학생들이 직접 써보는 행사가 있었다. 이때 눈에 띄던 어떤 선생이 있었다. 그는 생기 넘쳤고, 활기 있었으며 무엇보다 학생들과 함께 있는 것이 행복해 보였다. 빅토르 뒤리 고등학교의 한국어 교사, 임정원 선생이었다. 그날 한글 서예 행사에서 연신 열정적으로 학생들과 함께 했던 그는 당시 ‘’프랑스와 파리에 있는 한국인 부모님들에게 우리말, 한국어가 다름 아닌 프랑스의 공교육 제도속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꼭 전하고 싶다’’고 한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의미가 어떤 건지 알았으면 한다는 당부도 잊지않았다.  당시 그는 파리에서 빅토르 뒤리뿐만 아니라 장송드 사이 그리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기차를 타고 지방 도시인, 루앙 Rouen에까지 한국어를 가르치러 다니고 있었다. 힘들지 않냐고 하니 그 특유의 쾌활함으로, 재미있다고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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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정원 교사, 그가 공동집필한 저서들

프랑스에서 10년 동안 그는 한글학교에서 프랑스 고등학교,중학교 그리고 대학교에서 프랑스 학생들 그리고 교포 학생들을 가르쳐왔다. 그리고 프랑스 중〮고등학교 공교육 체계 속의 한국어 교육 보급의 현장에서 뛰어 왔고, 프랑스내  한국어 교육의 역사적인 순간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분필을 잡고 학생들과 함께 교육 현장에 있었던 것이다. 이런 역할을 한 그가 파리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왠지 이제 막 잘 돌아가기 시작한 톱니바퀴가 어긋나는 느낌을 받았다. 솔직히 가지 말라고 붙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임정원 선생을 만나 그의 이야기와 그간의 한국어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불문과 출신이시던데 어떻게 한국어 선생님이 되셨어요 ?

- 1992년부터 2017년까지 25년 동안, 중간에 아이를 낳고 기르는 데 전념했던 시간 1년 반 정도 빼고는, 계속해서 쉬지않고 프랑스어와 한국어를 가르쳐 왔어요. 한국에서도 여기 프랑스에서도요. 프랑스 문학을 너무 좋아해서 사실 프랑스에 유학 오고 싶었지만 사정 상 포기하고 대학에서 불어를 가르치며 박사 과정을 마쳤는데 논문을 중단해야 하는 상황이 됐어요. 그런데 그때 마침 모교에 있는 한국어학당 덕분에 ‘한국어 교육’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알게 되었죠. 90년대 초만해도 ‘한국어 교육’이란 용어 자체도 낯설고 그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도 없었어요.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친다고 하면 “영어를 잘하나?” 아니면“그거 아무나 할 수 있는 너무 쉬운 거 아니야?” 라고들 생각 했거든요. 그런데 알아보니 어학당 일은 문학 못지 않게 언어 교육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제 적성에 잘 맞을 것 같고 아이를 낳고도 계속 하기에 좋다고 생각해서 결단한 거죠. 돌이켜 보니 그것이 바로 제 인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도전이었는데 ‘신의 한 수”가 된 첫 번째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프랑스에는 언제 어떤 계기로 오시게 되었어요 ?

-2007, 마흔 살 때 왔어요. 불혹의 나이에 다시 모든 것을 버리고 제 인생의 두 번째 선택을 한 거죠. 연세대 한국어학당은 최대 규모의 한국어 교육 전문 기관이고 인프라와 체계가 잘 갖추어져 있어서, 12년 동안 일하면서 많은 것을 제대로 배울 수 있었죠. 한국어 교육 분야는 학문적 체계도 잡혀 가고 계속 엄청난 발전을 하는 중이라 비전도 있었고요. 가르치고 교재 개발 하는 것이 너무나 재미있었고요. 그래서 정말 두렵고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는데,이 선택도 결국 더욱 큰 ‘신의 한 수’였다고 생각해요. 당시 주 2회 서울에 있는 하비에르 국제학교에 출강을 하게 되었는데요, 프랑스 교육체계를 직접 체험해 보니 너무나 좋고 제 아이에게 잘 맞을 것 같아서 프랑스에 가기로 결심하게 되었어요. 또 제 전공인 불문학과 한국어교육 경험을 살려 ‘비교문학’을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다는 열정이 다시 생기기도 했고요.

아이 교육과 박사논문을 위해 프랑스에 오셨는데 어떻게 한국어를 가르치시게 되었어요 ?

-경제 사정이 안 좋아서 프랑스어 과외를 많이 하게 돼서 박사논문에 매진하기 힘들어졌죠. 한국에서 12년 이상 해온 일이 한국어 교육이다 보니 프랑스에 온 지 얼마 안돼  <파리한글학교>에서 가르치게 됐어요. 사실 제 스트레스의 90%, 보람의 90%도 한글학교 일이었어요. 그만큼 힘들고도 의미 있었어요. 마침 당시 한글학교는 큰 변화를 겪으며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체계적인 교수법도 교육과정도 없었어요. 제 경험을 살려 당시 한글학교 교장 함미연 선생님과 동료 선생님들과 함께 교육과정과 교안등의 기초를 닦기 시작했고 유럽 교사 세미나마다 초청되어 강의를 했죠. 그때까지 해온 한국어 교육과는 또다른 도전이었고 힘든 점도 많았지만 그만큼 오히려 많이 배우고 보람과 감동이 넘치는 소중한 경험이었어요. 덕분에 프랑스의 초등교육체계에 대해서 그리고 교민과 한불 가정의 자녀와 학부모들, 교사들에 대한 이해와 애정도 깊어졌고 그만큼 사명감도 생겼고요.  그렇게 한글학교에서 한국어를 4년동안 가르쳤는데 그때 교육부 공모 프로젝트인<맞춤 한국어>라고 해서 각국의 환경에 맞는 한국어 교재를 만들게 됐어요. 제가 제일 존경하던 선배, 한국어 교육계의 대모격이신 교수님과 예전 어학당 선생님들을 설득해서 이상적인 공동 집필진을 구성해서 참여하게 됐는데 평가가 아주 좋았고 저 뿐만 아니라 여러 교재를 만들었던 다른 집필진들 아주 애정을 가지고 자랑스러워 하는 교재예요. 그리고 교육원과 아펠락의 후원으로 프랑스 청소년들을 위한 의미있는 한국어 교재들도 공동집필했죠. 교재는 사실 잘 만들어도 비난만 받기 마련이고 힘들고 돈 안되는 일이지만 그만큼 배우는게 많고 보람있는 일이기도 한 것 같아요.

한글학교? 한글수업? 한국어수업? 어떻게 다른 거죠 ?

-외국에 사시는 분들은 ‘한글’과‘한국어’를 구별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한글’은 알파벳, 한자처럼 문자 체계의 이름이고, ‘한국어’는 프랑스어, 중국어처럼 언어의 이름,즉 말과 글 전체를 통칭하는 거죠. 흔히 ‘한글 배우러 간다’, ‘한글 수업한다’고들 하는데, 그럼 마치 단순히 ‘가,,,라…’ 즉, 한글 자모 읽고 쓰기만을 배우거나 가르친다는 뜻이 돼요. 말은 할 줄 아는데 글을 읽고 쓸줄 모르는 이들이나 어린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못 깨우쳤다’ 또는한국어를 못 떼었다’라고 하지 않고 한글을 못 깨우쳤다’, ‘한글을 못 떼었〮다’라고 하잖아요?

또 한글학교는 프랑스의 공교육 기관이 아니라 거기서 하는 수업은 방과 후 활동이나 특활, Activité Atelier 같은 거예요. 그런데 프랑스 학교에 정식으로 개설된 한국어 수업은, 수학 수업, 스페인어 수업처럼 프랑스 공교육 체계 안의 정규 교과목이 되는 거죠. 한글학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서 익숙한데, 프랑스 고등학교의 교과목으로 ‘한국어 수업’이 생긴 지는 얼마 안 되니까 혼동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부터는 학교에서 교과목으로 한국어를 배울 수 있으니까 바칼로레아 총점은 물론 내신 향상에도 도움이 되죠.

한국어 수업이 프랑스 고등학교에 개설된 지가 얼마나 되었나요 ? 그렇게 되기까지는 참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프랑스 고등학교에 한국어가 정규과목이 된 게 2011 9월이에요. 6년 됐죠. 보르도와 파리에서 열렸는데 파리에서 열리던 그날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파리지역 고등학교 연합 언어 교육 프로그램으로 한국어 수업을 개설하기 위해 수업설명회를 하는데 최정례 전 교육원장님, 당시 이 부분을 담당하셨던 이부련 전 교육원장님과 교사로서 제가 갔죠. 그때 파리 빅토르 뒤리 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 5명만 신청하면 파리 교육청에서 수업을 열어준다고 했다고 하셨어요. 당시 우리 교육원 측에서는 걱정이 많았어요. 학생수가 안 될까 봐서요.그런데 첫 해에 70명 이상이 온 거에요. 10배가 넘는 거죠. 게다가 프랑스 학생들이 30명 이상 등록했고요. 모두 놀랐죠. 그래서 다른 두 교사를 더 뽑아 첫 해부터 3반이 열렸답니다.

이렇게 예상밖으로 학생들이 많이온 이유는요 ?

-물론 양국 특히 한국 정부의 외교적 노력, 교육부의 정책적 지원, 프랑스 중고등학교의 교장들의 적극적 협력, 교육원장님들의 노력이 있었죠. 그런데 무엇보다도 저는 몇 년전부터 아펠락(한불언어문화교육자협회, 회장 이진명)의 한국문화 아틀리에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언어 그 자체에 관심이 생겨 배우겠다고 나서는 경우는 드물잖아요? 이미 수 년 전부터 양국 교육부의 후원 아래 아펠락의 전 현 사무총장님과 예술 강사들이 프랑스 중 고등학교에서 아틀리에를 열어 헌신적으로 한국문화를 소개하고 공연을 기획하고 홍보해 왔기 때문에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을 통해 한국어에 대한 관심이 이어져서 성과를 내기 시작한 거죠. 저도 처음엔 몰랐는데 프랑스 학교에서 프랑스 학생들과 프랑스 선생님들을 통해 직접 한국문화 아틀리에의 위력을 알게 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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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한불 수교 기념 한불 상호 교류 해 개막식 날 행사의 일환으로  파리 13구 귀스타브 플로베르 중학교에서 당시 프랑스 교육부 장관, 파리 교육감과 한국 국무총리, 양국 대사 등 양국 외교, 교육계 인사들 앞에서 한국어 수업 시연을 하는 임정원 교사.


한불수교 130주년 기념 한불상호교류의 해 때, 프랑스 중학교에 한국어가 정식 과목이 되고, 선생님이 강의 시연을 하셨는데, 그때 이야기 좀 해주세요.

-130주년 개막식 직전,당시 프랑스 교육부 장관과 한국의 국무총리 등 양국 정치 교육계 인사들이 귀스타브 플로베르 중학교를 방문했을 때 제가 수업 시연을 했어요. ‘가나다라’는 물론 읽지도 못하고 “안녕하세요?”도 잘 못하는 중학교 2학년 프랑스 학생들과 함께, 만난 지 2주 만에, 7시간 수업 만에, 프랑스와 한국의 소위 ‘높은 사람들’ 앞에서 1초의 어김도 없는 ‘완벽한 수업’을 보여주어야 했지요. 다행히 재미있게 잘했나 봐요. 벨카셈 교육부 장관이 끝나자마자 제일 먼저 제게 따로 와서 저의 교수법을 구체적으로 극찬하면서 프랑스의 교사들이 모두 보고 배우면 좋겠다고 했거든요. 그리고 학교 도서관에서 바칼로레아에서 한국어를 제2외국어로 지정했다고 발표했어요. 최초의 공식적인 발표였어요. 올랑드 대통령의 발표보다 먼저였죠. 그리고 플로베르 중학교가 프랑스에서 한국어를 최초로 가르치는 자랑스러운 학교라고 치하했고요. 이미 양국의 외교적인 협의가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린 학생들과 함께 공식적인 발표의 현장에 있었다는 것이 감격스러웠어요. 그런데 사실 제일 좋았던 건, 모든 행사가 끝난 후 교실로 돌아가자 학생들이 상기된 얼굴로 나를 에워싸며 껴안고 방방 뛰더니 흥분해서 나에게 헹가래를 쳤던 거예요. 아직은 얼굴도 이름도 낯선, 사실은 ‘아야어여’하고 ‘가나다라’ 노래로만 겨우 익힌 어린 프랑스 학생들이 무거운 선생님을 말이에요. 옆에 있던 동료 프랑스 선생님이 프랑스 학교에선 볼 수 없는 장면이라 정말 감동했다고 했는데, 순식간에 당한 헹가래라 사진이 없어 아쉽네요.

프랑스 중고등학생 상대로 하는 한국어 수업과 이곳 한인자녀들에게 하는 한국어 수업은 다르겠어요.  

-맞아요. 제가 직접 해왔던 프랑스 초〮중〮고등 그리고 대학생을 대상으로 나누어 말해보자면, 한글학교,  프랑스 중〮고등학교로 볼 수 있는데요, 한글학교는 아까 말씀 드렸다시피 공교육은 아니고 주로 교포와 한불 가정 학생들 대상이고요. 저는 프랑스 중고등학교도 맡고 있는데 크게  프랑스 학생들과 한인 학생으로 나눌 수 있어요. 수요일에는 파리 지역 고등학교 연합 수업으로 프랑스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초,,고급반이 있는데 저는 고급반을 맡아 프랑스 학생들의 바칼로레아 시험을 준비 시켰고요, 토요일에는 주로 교포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고급반을 가르쳤죠. 플로베르 중학교에서는 프랑스 중학생들에게 필수선택 과목인 제2외국어로서의 한국어를 가르쳤고 8대학에서는 교양 수업으로 한국어를 강의했었고요.

이렇게 성격이 다른 여러 공교육 기관에서 뛰어 다니다 보니 늘 정신 없고 많이 힘들었죠. 그래도 덕분에 프랑스 교육 체계를 수직적, 수평적으로 직접 체험하면서 “전천후”한국어 선생이 된 것 같아요.

선생님은 정말 프랑스에서 10년간 한국어 교육 현장에서 뛰신 분이네요.

-전 그게 너무 좋아요. 제발 돈 되는 일 좀 하고 하지만 나이에 맞는 지위를 좀 찾으라고들 하는데, 제가 사실 돈도 지위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저는 좀 낮은 지위, 좀 험난한 교육 현장에서 더 큰 것들을 얻으며 행복할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물론 한편 늘 힘들기도 했고 가지 않은 길은 미련이 있게 마련이지만요. 제 몫의 일을 잘했다는 점에선 자부심을 느껴요.  프랑스에서 한국어 교육이 잘 되려면, 사실 외교적, 정치적, 정책적, 행정적…정말 다양한 차원에서 각자 몫의 역할이 있는 거 같아요. 저는 “교육 현장의 노동자”몫을 열심히 잘했다고 자부해요.

한국어를 프랑스 학생들에게 가르친다는 자부심이 없으면 못할거 같아요.

- 저는 제가 한국에서 태어나서 한국어를 모국어로 가졌다는 게 무척 행복해요. 이 풍부한 언어가 내 모국어인 게 너무 기뻐요.하지만 한국어가 최고라고 “들이대는” 건 자부심 때문이 아니라 열등감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거부감만 주죠. 제가 제대로 알고 제대로 좋아하면 잘 가르치기 위해 고민하고 연구하게 되고 좋은 교수법을 찾아나갈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제가 “뜨겁지” 않으면 어떻게 학생들을 뜨겁게 할 수 있겠어요?

지난 25년간, 특히 프랑스에서 10년간 한국어 교사로 일하시면서 수많은 일화들이 있을 것 같은데요. 특히 기억에 나는 일이나, 혹시 학생이 있다면요..

-제가 25년 간 교육기관에서 프랑스와 한국에서 가르친 학생 수가 적어도 육 천 명이 넘어요. 과외 학생까지 하면 훨씬 많아지겠죠. 물론 속상하거나 화나는 일도 있었지만 정말 재미있는 일화와 추억과 감동이 있었을지 상상해 보세요. 책으로 쓰면 몇 권이 될 거예요. 한국에서 학생들에게 받은 엽서, 편지만도 라면 박스로 세 박스고 프랑스에서 받은 것도 한 박스예요. 선물이나 사진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래서 우리 한국어 교사끼리는 이 직업은 극한 직업인데 “마약”처럼 끊을 수가 없다고들 하죠.

파리에서 고등학교 연합 수업이 시작된 해에 바칼로레아에서 한국어를 필수선택 제2외국어로 보게 해달라고 학생들이 프랑스 교육부 장관에게 편지를 썼어요. 물론 그때는 안됐지만 그때 “너희는 지금 한국어 교육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데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고 말했죠. 그후 졸업한 그때 학생들이 한국어가 바칼로레아서 제2외국어로 지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나 기쁘다고 찾아왔을 때 가슴 벅찼죠.

한국어와 불어를 섭렵하고 계시는데요, 특별히 언어교육에 대한 조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

-제가 가끔 하는 말이 있는데요.“나는 말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만큼 ‘언어’라는 건 인간 존재에게 본질적인 거라고 절감했거든요. 그런데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건,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엄청난 사건이라고 생각해요. 언어를 배운다는 건 말이나 글을 넘어, 문화와 사회 그리고 인간 자체에 대한 탐구인 것 같아요. 그런데 제일 중요한 건 역시 “동기부여”겠죠. 좋아해야 잘하게 되고 잘해야 좋아하게 되니까요. 무엇보다도 재미있어야 되고, 학생들에게 실질적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뭔가 작은 거라도 이루어 내면 그 다음부터는 나아갈 수 있게 되니까요. 학생들이 제게 가끔 그래요. 왠지 선생님 “꼬임”에 넘어가 공부를 하게 된다고. 저는 가르치는 순간엔 어쩐지 모든 학생에겐, 어른이든 아이든 ”애정”이 샘솟곤 해요. 제가 먼저 마음으로 보고 들으면 학생들이 결국 따라오게 되더라고요. 중학생들은 어떨 때는  수업이끝났는데 한국어 수업을 더 계속 하고 싶다고 하곤 그래요. 2병 프랑스 중학생들이 한국어 수업 덕분에 마음 잡았다는 프랑스 학부모들 감사 인사 듣기도 하고요. 플로베르 중학교에서는 복도를 지날 때 자주 한국어 수업이 아니라 스페인어나 독일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학생인데  , ‘’마담 임, 안녕하세요 ?’’ 라고 인사하는 학생도 있죠.

비결이 뭐에요 ?

-사실 모든 학생은 “이기적”이라서 좋은 성적을 받는 걸 좋아해요. 학생은 재미있고 자기에게 이득이 되면 잘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려면 공부를 해야 되는데 공부가 즐겁고 부담 되지 않게 느껴져야 하는데, 뜻밖에 아주 작은 것들에 학생들은 재미있어하고 성취감을 느껴요. 그러면  더 잘하게 되고 더 좋아하게 되고요. 물론 반대인 날도 더 많지만요. 저 스스로가 행복한 선생이 되는게 비결이랄까?

선생님의 교육철학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 저는 교육은 “씨앗 돌보기”라고 생각해요. 학생들의 마음에 “씨앗” 하나 즉, 배우고 싶은 마음을 심어주고, 그 씨앗이 잘 싹트고 자랄 수 있도록 밭도 갈아 주고 물도 주고 햇빛도 잘 비치게 해주고… 정성껏 그리고 “잘”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효과적으로 돌보며 그 씨앗이 자신 만의 꽃을 피워내리라 믿고 응원하며 지켜 봐주는 거죠. 물론 씨앗 잘 돌보기가 어렵고 힘들고 귀찮을 때도 있지만요. 기대는 하지 않고 모든 씨앗의 잠재력을 믿고 각자 자신만의 꽃을 피우도록 사랑으로 지켜 보면 뜻밖의 아름다운 꽃을 보게 되니까요. 사실 자신만의 꽃을 피워내는 건 결국 각각의 씨앗 자신이고 모든 꽃은 자신만의 향기와 아름다움이 있잖아요. 교육현장에선 그럴 깨닫고 실감하게 되는 일이 많이 있어서 행복해요. 그리고 ‘’배워서 남주자’’라고 말하고 싶은데요, 제게 가르치는 것은 함께 나누기 위한 것이거든요. 그럼 제가 더 풍요롭고 행복해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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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연합 교육 프로그램( EIE Enseignement Inter-Etablissements) 으로 2011년부터 한국어 수업이 개설된 파리 7구 빅토르 뒤리 Victor Duruy 고등학교에서 2015년 종강날, 바칼로레아 준비반 학생들과 동료 조혜영 교사(사진 오른편 검은색 옷)와 함께 (사진 왼편 주황색 옷이 임정원 교사) 


선생님은 프랑스 내 한국어 교육의 산증인이라고 할만해요. 그런데 이렇게 한국어가 프랑스 학교내에서 잘 자리잡도록 하시고는 왜 한국으로 가세요 ?

-무엇보다도 건강 상의 이유예요. 우선 몸과 마음을 쉬고 비우면서 건강을 회복하고 싶어요. 비워야 채워지고 그래야나눌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아까 말한 제 첫 번째, 두 번째 도전과 선택에 이어 이게 세 번째 도전과 선택이에요. 두 번의 선택 때마다 너무나 두렵고 힘들었지만 제 선택에 책임을 지고 도전해서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앞의 선택들이 다음의 선택들의 바탕이 되었고요. 그래서 이번에도 제가 여기에서 10년 동안 배우고 느낀 것을 바탕으로 나누기 위해 세 번째선택을 하게 됐어요. 한국으로 간다고 하니 사람들이 그렇게 고생하고 겨우 안정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데 왜 가냐고 하는데, 사람이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원래 몸이 무척 약한 사람인데 열정이 넘쳐 해냈던 것 같거든요. 그런데 이런 상태로라면 건강이 계속 악화되고,  그때가 되면 적당한 눌러 앉아 도전할 용기를 잃게 될 거같아요. 그래서 쉬지 않으면 안된다는 위기감을 느끼는 지금, 더 늦기 전에 한국으로 가야겠다. 이렇게 결정했어요.

한국으로 떠나시는데 아쉬운 점은 없으세요 ?

-무엇보다 아이 교육을 위해 프랑스에 왔는데 다행히 그 목표는 초과 달성한 것 같아요. 200% 만족해요. 아들이 프랑스 교육의 좋은 점은 다 누리면서, 자기 재능, 좋아하는 것, 잘할 수 있는 것, 소명까지 찾았고 무엇보다도 즐겁게 공부하고 행복해 했거든요.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알을 깨고 스스로 나오도록 놓아 주고 믿고 지켜 보며제 길을 가는 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한편 한편 소르본느에서 정말 훌륭하시고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시는 지도교수님도 만났는데도 박사논문을 마치지 못했다는 게 부끄럽고 아쉬워요. 여기 중고등학교에서 한국어 교사가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한국에서 오래 해왔던 일이 그거라서, 현장에 놓이면 열정과 사명감이 생기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요. 열심히 했고 많이 힘들고 지치기도 했지만 내적 충만감을 더 깊이 느낄 수 있었어요. 하지만 한국어 교육 정착을 위해 여기저기 너무 뛰어다녀야 하다 보니… 정말 가르치는 일 자체에만 더 집중하기 어려웠다는거, 그게 아쉬워요.  어쨌든 여기서 제가 할 수 있는 몫은 했다고 생각해요. 이젠 좀 더 젊은 세대들이 배워가면서 교육 현장에서 뛰면 좋을 거 같아요. 교사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어요. 가장 큰 문제는 할수 있는 역량과 자질과 경험을 갖춘 교사가 부족하다는 거에요. 물론 훌륭하신 분들이 있는데 프랑스 중고등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친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고, 한국어 교사는 국어 교사하고는 다르니까요. 교사 양성에 기여하고 싶었는데 그것도 아쉽네요.

어릴때부터 교사, 가르치는 것이 혹시 꿈이셨는지요 ?

-그랬던 것 같아요.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제 꿈은 ‘’교육혁명’’이었어요. 사춘기 때 무엇보다도 교육제도가 너무나 불만스러웠거든요. 그런데 방법은 도무지 모르겠더라고요. 교육부 장관, 대통령까지 생각해봤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았고, 결국 “교육 혁명을 일으켜야겠다”는 엉뚱한 결론을 내렸어요. 2병이었죠. 그러려면 “힘”을 길러야겠고 힘을 기르려면 뭘 좀 알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책을 많이 읽다 보니 문학에 심취하게 되었죠. 그 후에도 가끔 그 꿈을 생각하고 이야기하곤 했는데, 사실 제가 그 꿈과 무관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해 왔어요. 그런데 제가 결국 지난 25년간 내 나름의 방식으로 제 꿈의 길을 걸어왔다는 걸 프랑스에서 깨닫게 됐어요. 25년 동안 제가 가르친 또는 그냥 스치듯 만난 수많은 학생들, 학부모들 안에서 교육혁명의 길을 찾으려 애써왔다고 생각해요. 그들을 통해, 가르치면서 만나면서,무엇보다도 실수와 좌절을 통해 제 안에서 스스로에 대해 크고 작은 교육혁명을 이루어 가고 있는 것 같아요. 사실 남들이 보기에는 버젓한 자리도 없어 보이고, 제 자리를 잡았는데 한국으로 가는데요,  제 자신은 그때 품었던 생각대로 일관되게 가고 있다고 생각해요.내 안에서의 교육 혁명이었고, 만나는 사람마다 작은 혁명을 일으켰다고 생각해요.

이제 이곳 한국어 교육 현장을 떠나 한국으로 가시는데요, 앞으로 계획이나 하시고 싶은 일이 있다면요.

-우선 쉬면서 몸과 마음의 건강을 찾고 “교육혁명”의 길을 계속 갈 거예요. 이번에도 “신의 한 수”였다고 말할 수 있도록 잘 쉬고 다시 열심히 해야죠. 물론 이제는 좀 다른 방법, 다른 모습으로 새로운 도전을 하려고요. 구체적인 계획은 나중에 결과로 보여 드릴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프랑스의 한국어 교육 현장에서 뛸 후배 교사들에게 행복한 교사가 되라고 말하고 싶어요.  즐겁게 잘 가르치면 학생들도 그 시간만큼 행복하게 배울 수있다고 믿어요. 좋아하면 잘하게 되고 잘하면 좋아하게 되잖아요.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교사의 능력과 열정 뿐만 아니라 제도적 뒷받침이 있어야겠지만요...

 

                                                                                                                                        <파리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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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 노르망디 옹플뢰르 Honfleur 한국문화페스티벌 개막식에서,
                    손차룡 아트 디렉터(좌)와 행사를 후원한 안 사빈 앙드리유 Anne-Sabine ANDRIEUX(우)



8 18일 프랑스 노르망디 옹플뢰르 Honfleur에서 2017 한국문화페스티벌(Korea Live 2017) 개막식이 있었다. 코리아 라이브 KOREA LIVE 한국문화페스티벌은 2014, 유럽의 피렌체라고 불리우는 독일 드레스덴에서 시작하여 올해는 노르망디 옹플뢰르에서 개최하게 되었다.

인상파 화가들의 요람으로 불리기도 하는 옹플뢰르 Honfleur는 바스 노르망디 지방, 칼바도스 주에 있는 조그마한 항구도시이다. 항구 주변으로는 15, 16세기의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11세기에 세워진 이 도시는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 전쟁 동안 여러번 점령을 당하기도 했고, 19세기 초부터는 화가들의 활동 중심 지역이었다. 화가 위젠 부댕 EugeneBoudin의 출생지이기도 하고, 모네 Monet, 뒤부르주 Dubourg, 종키드 Jongkid, 보들레르 Baudelaire등이 자주 이 지역에서 모였으며, 인상파 화가들을 잉태한 도시이기도 하다. 요트타기와 관광업의 중심지이자 소규모이지만 어업의 요지이기도 하고, 예전에는 소금무역항으로 유명했다. 당시의 소금창고는지금 전시장으로 탈바꿈했고, 이번 2017 한국문화페스티벌의 아트페어와 공연, 한국 전통 문화 부스들이 이곳에 설치되어 있다.

이번 행사 아트 디렉터이자, 화가인 손차룡 화백은 수년전부터 옹플뢰르에서 활동하면서 한국전통문화를 알리기 위한 행사들을 조직해오고 있다. 손차룡 화백에 의하면, ‘’독일 기업인의 후원으로 이루어지는 본 행사는, 2014년 독일에 Get Together Culture- GTC를 설립하고 약6억원이라는 적지 않은 후원금으로, KOREA LIVE가 주최하며 드레스덴 시와 베를린한국문화원이 후원하여 축제와 아트 페어 ART FAIR를 개최한 바 있다. 그 후원자는 2017Association Culture Coréenne-ACC 한국문화협회를 프랑스에 등록설립하고, KOREA LIVE 행사를 후원한다. 그가 이러한 행사를 후원하는데에는 남다른 한국문화에 대한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친구가 되는 것은 상대의 문화를 존중하는데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하면서 유럽인이 가지지 않은 독특한 한국의 문화에 매료가 되었고,유럽인들이 이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마음에, 한국문화 알리기를 순수하게 후원하고 있다.

또 손차룡 화백은 ‘’문화예술이란 가슴과 마음에 담겨진 것들이 표면화 되는 것이다. 한국의 문화는 훌륭한 전통철학을 품고 있으며 현대에도 그러한 철학이 내재된 작품들을 끊임없이 탄생시키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세계와 경쟁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유럽인들 가슴에 우리 문화가 스며들게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행사에 앞서 보도자료를 통해 전해왔다.


옹플뢰르 구석구석에 우리의 가락이 울려퍼져

이날 식전 행사로 한국문화협회(회장 작크 브뤼셀)현판식이 손차룡 화백 갤러리에서 있었다. 박재범 주 프랑스 한국문화원 원장, 김종수 신기회 회장, 작크 브뤼셀 Jacques BRUXELLE 한국문화협회 회장, 쟝 롱바드 Jean LOMBARD 부회장,안 사빈 앙드리유 Anne-Sabine ANDRIEUX 사무국장, 손차룡 아트  디렉터가 참석한 가운데 한국문화협회 현판을 두르고 있던 띄를 내렸다. 이후 사물놀이, 노상풍류 팀이 옹플뢰르 거리를 돌았고, 옹플뢰르 항구에서 배를 타고,  뱃머리에 청사초롱을 놓고 우리의 가락을 연주하며 뱃노래와 민요들을 불렀다. 항구의 식당과 까페에 있는 이들은 일제히 관심을 가지고 보았고, 핸드폰으로 촬영했으며, 어떤 이는 우리 가락에 맞추어 팔을 높이 올려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했다. 옹플뢰르 구석구석에 우리의 가락이 울려퍼졌으며, 뱃놀이 공연을 한 배에서 바라본 옹플뢰르 시청에는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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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뱃놀이 공연 중인 노상풍류 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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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목 김종홍의 장승 제작 퍼포먼스

뱃놀이 공연 이후 아트페어와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는 소금창고로 향했다. 소금창고 앞에서는 타목 김종홍의 장승제작 퍼포먼스가 있었다. 김종홍씨는 먼저 박재범 주 프랑스한국문화원 원장에게 붓을 주어 제작된 장승의 눈을 색칠하게 한후 나무를 깎으면서 장승을 만들었다. 장승 제작 퍼포먼스에는 인근 항구도시인 르아브르 Lehavre의 뤽 르모니에 Luc LEMONNIER 시장과 나탈리 파펭 Nathalie PAPIN 옹플뢰르 부시장이 참석했다. 장승제작 이후 참석한 인사들은 우리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이후 소금창고안에 마련된 무대에서 옹플뢰르 부시장과 르아브르 시장, 주프랑스 한국 문화원 원장 및 아트페어 위원장(권순철 화백), 그리고 지역 인사 및 주민들, 한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막식이 있었다.  

소금 창고는 두 군데로 나뉘어서 한국작가들로만 이루어진 국제 아트페어가 열리고 있고, 다른 쪽은 개막식 및 공연을 위한 무대와 서예, 전통 매듭, , 탈 만들기 부스 등이 설치되어 있다. 

개막식에는 나탈리 파펭 옹플뢰르 부시장과 박재범 주프랑스 한국 문화원 원장의 인삿말이 있었다.


‘’여러분과 우리의 가슴을 열고 진실한 친구가 되는 자리이기를’’

박재범 원장은 인삿말에서 오랜 역사의 도시인 옹플뢰르에 한국문화페스티벌이 열려 함께 하게 된것을 매우 행복하게 생각한다고 하면서, 이 같은 규모의 한국 페스티벌이 열린 것은 이 도시에서는 처음이고, 주민들이 한국문화를 발견할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이번 페스티벌은 한국은 단지 첨단기술과 경제력의 나라일뿐만 아니라, 프랑스처럼 오랜, 그리고 풍부한 문화를 가진 나라임을 보여줄 것이라고 했다. 박재범 원장은 옹플뢰르 부시장과 르아브르 시장, 그리고 한국문화협희 회장인 작크 브뤼셀과 손차룡 아트 디렉터, 권순철 아트 페어 위원장에게 감사함을 전했다.

한국문화협회의 작크 브뤼셀 회장은 ‘’경이로운 행사 ‘’라고 하면서, 한국의  거대한 문화가 우리를 사로잡을 것이라고 했다. 작크 브뤼셀 회장은 앞으로 10일간 다양한 아뜰리에서 접할 한국의 문화에 대해 놀라게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또 ‘’우리 브르타뉴 지방보다 조금 더 큰 한국인데 세계속의 위치가 인상적’’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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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 옹플뢰르 한국문화페스티벌 아트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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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막식후 이어진 국악공연


손차룡 아트디렉터는 끌로드 모네가 진실의 눈으로 자연을 보지 못했다면 세계 미술의 흐름을 바꾸지 못하였을 것이고, 가난과 고통의 시절을 보낸 빈센트 반 고흐나 외젠 부당의 그림에는 진실이 있었기에 사람들은 감동을 받는 것이다. 겉모습의 포장을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진실앞에서는 껍질이 벗겨지는 것이라고 하면서, 행사의 구석구석을 잘 들여다 보기를 당부했다. 그는 또 ‘’저 멀리 동쪽 대한민국에서 전하는 진실한 사랑의 메세지가 여러분의 가슴에 다가올것입니다. 여러분과 우리의 가슴을 열고 진실한 친구가 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면서, 그에게 특별한 친구이자, 은인, 그리고 독일과 프랑스에서 크나큰 한국문화 페스티벌을 열도록 후원을 하고 있는 안 사빈 앙드리유 Anne-Sabine ANDRIEUX를 소개했다   


‘’한국문화 예술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수 있는 행사’’

이번 행사에는 전통국악공연 4개팀 53,결련택견 6, 워크숍에 대한민국 염색명인과 명장 10명이 참가하여 한국문화의 진수를 보여주게 되고, 명장 명인들의 서예, 전통 매듭, 안동탈 만들기, 김치담그기도 있다. 한국작가들로만 이루어진 아트페어에는 500여점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노르망디 지역언론, 르페이도쥬 le pay d’auge에서 행사를 취재 나온 기자는 ‘’지역예술가협회인콩트르 꾸랑contre-courant’을 통해 한국문화와 예술을 어느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이번 행사를 통해 좀 더 구체적이고 폭넓게 알게 되고, 닫힌 미술관 같은 공간이 아닌 옹플뢰르 도시 전체에서 진행되어 더욱 좋다’’고 했다.

올해로 60주년된 한국 구상미술단체인 신기회는 회원들 작품 80점을 이번 아트페어에 출품했다.  이날 개막식에서 김종수 신기회 회장은 오랜 역사를 가진 우리 조그마한 나라가 예술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는 민족인데도 불구하고, 유럽이나 다른 나라들이 우리를 너무 모르고 있다. 이번 행사 후원자가 우리 문화에 매료되어 이런 행사를 할수 있게 해준 것에 감명을 받았고, 이렇게 직접 참여해봄으로써 우리 문화의 소중함을 더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참여 소감을 밝혔다.  

이 행사는 한국문화협회 Association Culture Coréenne-ACC 주최하고, 옹플뢰르 시가 초청했으며, 주 프랑스한국대사관,주 프랑스한국문화원, 한국관광공사파리지사, 프랑스한인회, 프랑스한국언론협회, 한국미술협회 신기회, 단원미술관, 금보성아트센터, 진주미술관, 노상풍류,경남국악관현악단 휴, 다현악회, 대한문화예술단,결련택견협회, 루앙한글학교등에서 후원했다.

 

2017 옹플뢰르 한국문화페스티벌

일시; 2017.8.18()~27()

장소; 9B Rue de ville 14600 Honfleur/Normandy

      소금창고와 항구, 시청광장, 시내일원  

프로그램은 사이트 참조 http://www.korea-live.com/

                                                                                                                                 <파리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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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역사 외교 아카데미 홈페이지 화면 캡쳐

(문화,文化)유산화(遺産化)는 공공집단이 유.무형의 어떤 대상, 오브제에 대해 유산의 지위를 인정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유산으로 적합하게 만드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공공집단은 그 오브제들을 생산했던 전세대의 세습자(héritier)가 된다.이로서 세습자는 이 오브제를 후대에 전달하기 위해 지켜야 하는 의무를 가진다.
그런데, 이러한 (문화)유산화 개념은 근본적으로 일종의 함정이 있다.
모든 이들이무엇이 (문화)유산을 만드는가에 대해 동의하기 때문이다 ; ,명백하게 공통된 하나의합의(consensus)’. 이것은합의가 만들어내는 유산의 특성들 중 하나다.‘무엇이' 문화유산을 만드는지에 대해 심사숙고해 보면, 이는 사실 현대예술에서 말해지는합의와는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문화)유산은 유산으로 인정될 당시,'합의'가 된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단체(조합,협회 등)가 유산의 지위를 가진 이러한 요소를 인정시키기 위해 개입하고 투쟁할때에는합의를 도출하거나 쟁취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대상(오브제)(문화)유산으로 인정되는 순간 유산으로 공표되는 장소에서합의'는 만들어진다. 물론 이 정의는 앞서 언급한 유산화를 완벽하게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왜냐면, 합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유산이 무엇인지를 명명백백하게 알아야 한다는 어려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문화)유산은 개인의 것인가 아니면 공공재인가 ? 등등, 국가의 문화유산으로 인정된 경우 당연히 매매를 할 수 없다. 이는 법적인 문제로 오브제 그 자체만의 사회적 지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문화유산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는 문화재들이 지속적인 개보수 과정이 있었고, 어떤 오브제들은 국가의 민족주의(내셔널리즘)의 상징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 가문(가족), 가족에 속한 유,무형 재산들도 있으며, 이들중 많은 것들이 현재 공공재의 지위를 가진 것으로 법적 인정되었다.

이처럼, 보존(conservation)의 관점보다는 대중(public)의 관점에서 접근해 볼때하시마 섬(군함도)’의 세계유산 등재는합의에 의한 과정을 완벽히 무시하며 스스로가 유산으로서의가치를 잃어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다. 

세계유산으로서하시마 섬(군함도)’은 도대체 어떤유산인가 ? 한때, 대표적 전범기업으로 불리는 미쓰비시의 소유(1890년 매입,해저탄광 개발)였던 군함도는 단순히 일본의 근대화를 뒷받침할 탄광이자 메이지(明治) 산업혁명시대를 대표하는 혁신적인 역사적 결실로 긍정적 가치만을 지닌 유산일까 ?

하시마 섬의 유산화(遺産化) 추진 당시 한국은 강제징용 시설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것에 대해합의하지 않았다. 그리고, 유산 등재를 위해합의를 도출해내야만 했던 일본은 « 일본 근대산업시설에서 의사에  반한 강제노동이 있었음( ‘forced to work’) »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결정문에 명시키로 하고, 한국과 일본은 이들 시설의 유산 등재에합의했다.

2015 7 5일  군함도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당시 사토 구니(佐藤地) 주유네스코 일본 대사는 « 강제노동으로 희생된 각국 노동자를 기억하기 위한 정보센터 설치 등을 이행하겠다 »고 약속했다. 그러나,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직 이행하지 않다. 또한, 일본은 등재 이후 바로‘forced to work’라고 말한 것은 강제노동의 의미는 아니라며 입장을 바꿨다.

군함도 그 자체는 충분히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하지만, 이 유산의 가치는 민족학적, 역사학적으로 충분히 고증된 사실을 여과없이 정확하게 대중에게 공개할 의무을 이행했을 경우에만 인정받을 수 있다. 유산이란 역사의 전달자이기 때문이다. 

‘반크(VANK)'역사 외교대사 모집

사이버 외교 사절단반크(VANK, Voluntary Agency Network of Korea)’는 군함도(하시마섬)에 조선인을 강제징용한 사실을 계속 숨기고 있는 일본 정부의 역사 왜곡을 전 세계에 알릴19기 글로벌 역사외교 대사’400명을 모집한다고 지난 11일 밝혔다.

 «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2015 7전체 역사를 기술하라는 권고사항을 포함해 군함도를 비롯한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의 조건부 등재를 결정했지만 일본 정부는 여전히 조선인 강제노동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런 일본의 두 얼굴을 국제사회에 고발하기 위해 이번에 역사외교 대사를 뽑는다 »고 박기태 반크 단장은 말했다.

고교생과 대학생이 주 모집 대상으로 오는 16일까지 반크 홈페이지(peace.prkorea.com)를 방문해 응모하면 된다. 신청자들은 21일 오후 국립중앙박물관 대강당에서 진행하는 발대식 및 교육에 반드시 참가하고 이 과정을 통과하면 8 24일까지 역사외교 대사가 되기 위한 활동을 해야 한다.

반크의 주요활동은하시마 섬이라는 제목의 한글, 영어 동영상을 제작·배포해 참가자들이 SNS로 세계 곳곳에 알리도록 할 계획이다. 참가자들은 전 세계 교과서, 세계지도, 웹사이트에동해, 독도, 한국역사 표기 오류를 조사하고 시정하는 동시에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에게도 한국역사를 바로 알리는 활동도 전개한다.

반크는 지난 2011년부터 동북아 역사재단과 공동으로사이버관광가이드이자글로벌 역사외교대사를 양성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총 150명을 대사로 임명했다.


                                                                                                      < 파리지성 / 현 경, dongsimijs@gmail.com >  

 

세계의 풍경 展 Paysages du mo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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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샤를 드 골 공항에서는 마르셀 뒤샹 상(Prix MarchelDuchamp) 수상자들의 작품들을 터미널 2EEspaceMusées에 전시하며 많은 여행객에게 감상할 기회를 제공한다. 20세기 현대 미술가 중가장 영향력 있는 마르셀 뒤샹의 이름을 딴 가장 권위 있는 상중에 하나인 이 상은 2000년 국제 프랑스현대미술 국제화 추진회(ADIAF)가 주관하고 퐁피두 센터와 함께 협력하여 프랑스의 유망한 젊은 아티스트들을 알리기 위해 제정되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9명의 수상자의작품들이 전시되며 풍경(paysage)에 대한 작가들의 다양하고 독창적인 생각들을 보여준다.


전시 기간 : 2017 1 21일부터 2018 1 16일까지

전시 장소 : 파리 샤를 드 골 터미널 2E 전시장

                Espace Musées de l’Aéroport Paris-Charles de Gaulle


입장료 : 탑승권 소지 시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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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챤 디올 展 Christian Dior, couturier du rê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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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장식미술관에서는 메종 디올(Maison Dior) 70주년을 기념하며 전시를 개최했다. 가장 방대한 전시로 이번 회고전에서는 1947년부터 오늘날까지의 드레스, 그림, 사진, 각종 패션 악세사리 등 다양하게 전시된다. 설립자뿐만 아니라 그를 이어왔던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 마크 보앙(Marc Bohan), 지안프랑코 페레(Gianfranco Ferré), 존갈리아노(John Galliano), 라프 시몬스(Rafsimons), 최근의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Maria Grazia Chiuri)에 이르는 7명의 디자이너의 작품들이 선보여진다. 전시는 연대기별, 테마별로 보이며 디올이 70년 동안 어떻게 세계적인 브랜드로 발전되었는지 보여준다.


전시 기간 : 2017 7 5일부터 2018 1 7일까지

전시 장소 : 파리 장식 미술관 Les Arts Décoratifs

입장료 : 11유로 / 할인 8,5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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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얽힘. 놀라운 얽힘 展 Inextricabilia. Enchevêtrements magiq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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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티유 광장에서 근처에 위치한 현대 미술 전시장, 라 메종 루즈(La Mason Rouge)에서는 아르 브뤼(Art brut)의 작품들과 아프리카의 의식용 오브제들, 아트 사크레(art sacré), 대중예술(art populaire), 모던 아트, 현대 아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들이얽힘’(l’enchevêtrement)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전시되고 있다. 이번 전시는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에릭 디트망(Erik Dietman), 만레이(Man Ray), 아네트 메사제(Annette Messager)같은 유명 아티스트부터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까지 약 50여 명의 작가와 함께 한다.

 

전시 기간 : 2017 9 23일부터 9 17일까지

전시 장소 : 라 메종 루즈 La Maison Rouge

입장료 : 10유로 / 할인 7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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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고흐를 상상하다 展 Imagine Van Go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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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빌레트의 그랑 알(Grande Halle)에선 특별한 전시를 선보인다. 이 전시에는 실제 고흐의 작품들은 없지만, 그림을 보여주는 대형 스크린이 작품과 작가의 삶을 체험하게 한다. 연출가인 아나벨 모제르 Annabelle Mauger와 쥴리앙 바롱 Julien Baron은 반 고흐만의 예술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11m의 대형 스크린을 사용했고 모차르트(Mozart), 바흐(Bach)의 음악과 다채로운 영상미로 관객들을 작품 안에 들어가게 한다. 자연, 일상, 전원생활 등을 다룬 고흐의 200여 점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어린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모든 연령대가 함께 할수 있는 전시다.


전시 기간 : 2017 6 23일부터 9 10일까지

전시 장소 : Grande Halle de la Villette

입장료 : 14,90유로 / 할인 12,90유로

 

                                      프랑스, 2차 대전 중 유대인 대량 검거(Vel’d’Hiv’) 사건

                                                  마크롱 대통령, 프랑스 책임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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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6()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벨디브 검거 75주년 연설에서 ‘벨디브 검거를 조직한 것은 바로 프랑스였다’고 하면서, 이 비극에 프랑스의 책임을 온전히 인정했다.

1942 7 16일과 17일 당시 프랑스의 친나치 정부인 비쉬정권은 나치의 명령으로 파리의 벨로드롬 이베르 Vélodrome dhiver(일명VéldHiv)라는 사이클 경기장에 프랑스 내 유대인 13152명을 검거해서 수용한 이후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감시킨 사건이다. 이들 중 약100명 정도만 생존했다. 원래는 7 13일에서 15일로 예정되었는데, 혁명기념일을 피하고자 16일과 17일로 연기되었다.

마크롱 대통령은 독일인 한명도 참여하지 않은 사건임을 밝히면서, 1995년 프랑스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벨디브 검거의 장본인은 프랑스임을 인정한 작크 시락과 같은 입장임을 밝혔다. 1995 716일 당시 작크 시락 대통령은 비쉬 정권에게 책임을 돌리기 보다는 유대인 박해 측면에서 프랑스의 책임이라고 인정했다.

벨디브 검거 사건에 대한 프랑스의 책임 여부에 대해 프랑스 사회에서는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왔다. 왜냐하면 벨디브 검거는 2차 대전중 프랑스에서 가장 많은 유대인들을 체포해서 이송시킨 사건이고, 드골과 미테랑은 벨디브 검거에 대해 프랑스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작크 시락이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프랑스 책임을 인정하는 발언을 한 것이다.

이에 프랑스의 우파 논객인 에릭 제무르의 저서<프랑스의 자살> 에서, ‘시락은 당시의 친나치 비쉬정부를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발언이기도 하다’고 지적하면서, ‘드골에게 있어서 독일군 군화속에 있는 프랑스는 프랑스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프랑스는 통치권을 가지고 있기 않았기 때문이다.

시락의 이같은 발언은 비쉬정부가 저지른 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오로지 휴머니즘에 대항한 범죄임을 증명한 것이었다. 이는 또한 2차 세계대전에 대해 새로운 접근 방식이었는데, 나치에 대항한 유일한 전투였다는 것, 독일과 역사를 떠난 것, 그리고 세계와 유럽의 헤게모니를 위해 국가들의 전투에서 멀어진 해석을 낳게 했다.’고 비판한 바 있다.

미테랑 전 대통령 또한 이에 대해 ‘프랑스가 사과해야 된다고 하는 이들은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것’ 이라고 했다.

벨디브 검거 사건의 프랑스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측은 당시 친나치 정부인 비쉬정권하에서 저질러진 사건이기에 프랑스가 행한 것은 아니라는 것과 어쨌든 프랑스인들이 한 것이기에 프랑스의 책임이 있다는 측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당시 런던에 프랑스 임시정부를 수립한 드골의 입장에서는 프랑스의 책임을 인정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한편 극우 정당인 국민전선당의 전 대표인 쟝마리 르펜의 딸이자 국민 전선당을 이끌어가고 있는 마린 르펜은 지난 4월 프랑스 대선을 앞두고 벨디브 검거 사건에서 프랑스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발언을 해서 논란이 되었다. 르펜은 당시 LCI 방송과 르피가로(le figaro) 등과의 공동 인터뷰에서, ‘벨디브 사건’에 대 한잘못과 책임은 ‘당시의 권력자들’로 프랑스와 관련된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이같은 발언이 알려지자, 당시 대선 후보였던 엠마뉘엘 마크롱은 ‘르펜이 역사적·정치적으로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르펜이 쟝마리 르펜의 딸이라는사실을 잊은 사람들이 있다. 이들 부녀는 변하지 않았다.’고몰아세웠다. 르펜의 아버지인 쟝마리 르펜은 극우 정당 국민전선(FN)을 창당한 극우 정치인으로 외국인 혐오와 유대인 학살 부정 발언 등으로 수차례 유죄 판결을 받은 전력이 있다.

이스라엘 정부도 르펜의 이같은 발언에 대해 강하게 규탄했다. 이스라엘 외무부는 성명을 내고 ‘프랑스의 유대인들이 나치의 홀로코스트(대학살)로 희생된 것에 대해 역대 프랑스 대통령들이 인정한 역사적 사실을 거스르는 발언’ 이라고 비난했다.

해당 발언이 문제가 되자 르펜은 해명 성명을 내고 진화에 나섰지만, 반응은 차가웠다. 그는 2차 대전 당시 프랑스 망명정부는 런던에 있었으므로 프랑스의 책임이 아니라는 뜻에서 발언한 것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덧붙여, 비쉬 정권은 프랑스가 아니었으며, 프랑스인들의 책임이 없다고 말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2012 7 16일 올랑드 전 대통령은 <프랑스에 의해 프랑스에서 저지른 범죄>라고 했다.


                                                                                                                                         <파리지성>

 

                                                                <신인 작가를 소개합니다>

음악과 회화,  그 관계에 대해, 우크라이나의 갈리나 포펠니스카 작가

본지는 지난 1월부터 <신인작가를 소개합니다> 라는 코너를 마련하여 주기적으로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작업 활동을하고 있는 신인 작가들을 집중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번주는 아홉번 째 순서로 ‘음악과 회화,그 관계에 대해 , 우크라이나의 갈리나 포펠니스카 작가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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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비의 정원’ 시리즈 중 한 작품 앞에 선 갈리나 포펠니스카 작가

우크라이나의 해안에 접한 문화도시인, 오드사 Odessa에서 태어난 갈리나 포펠니스카 Galyna Popelnytska26세로, 프랑스로 유학을 와서 파리 8대학에서 학부 과정을 마치고, 9월부터 파리 1대학 석사과정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사진 및 회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는 2015923일 파리에  도착했다. 그에게 이 날은 두번째 생일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는 예전부터 파리에서 사는 것을 꿈꾸어 왔고, 예술과 파리는 동떨어져서 생각할수 없으며, 예술가로서의 삶의 연장으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도출해낼수 있는 도전의 장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8대학에서 여러차례의 개인전을 가졌고, 또 몽마르트르의 아이 갤러리(I- Galrie)에서 개인전, 파리에서 단체전도 여러차례 가진바 있다. 모든 작가들이 그렇겠지만 갈리나 작가는 혼자 작업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될수 있으면 많은 전시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작품을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는 이것 또한 작업의 한 부분이라고 한다

파리 15구에 있는 그의 집이 아뜰리에다. 어느날 초대 받아 간 그의 집에는 사방이 작품들로 둘러쌓여 있었다. 대부분 정물화였는데,그가 각 작품 마다 얽힌 이야기를 해주는데, 더이상 단순한 정물화가 아닌,작품의 느낌이 달리 다가왔다. 정물화뿐만 아니라, 초상화, 풍경 작업을 하고 있었고, 6년전부터 각 도시를 다니면서 문을 사진 찍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특히 그의 회화 작업은 음악과 연관성을 가진다. 비발디의 사계를 들으며 12개월을 표현한 꽃 작업 12점이 있다. 갈리나 작가는 언어가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을, 음악을 들으며 표현해낸 회화 작품들로 관객과 소통하고자 한다. 그가 파리와서 작업한 신비의 정원은 은색 혹은 금색 화폭 위에 먹으로 표현했는데, ‘신비한 정원답게 직선과 곡선속에는 숨은그림 찾기하듯 구체적인 형상들을 찾아낼수있다. 그의 작품들에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으며, 그의 가치관과 세계관, 예술관까지 끊임없이 설명한다. 풍부한 상상력과 고정되거나,정형화 하지 않은 열린 사고속에서, 음악과 회화를 결부시켜 작업을 하고 있는 갈리나 작가를 만났다.


어릴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어요 ?

-, 어릴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어요. 할아버지가 화가였어요. 방학 때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 갔을때 할아버지가 굳게 침묵한 채 집중해서 캔버스에 붓과 여러가지 색깔의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은 나에게는 미지의,신비로운 큰 세계였어요. 그때부터 화가가 되고 싶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는 내가 피아니스트가 되기를 원했어요. 그래서 6살부터 피아노 학교에 다녔어요. 매일 7시간을 피아노를 쳤어요. 그러다가 피아노 학교에 회화 수업 포스터를 보게 되었어요. 그래서 부모님 몰래 그 수업을 들었어요. 2년뒤에 엄마가 눈치를 챘죠. 그리고는 회화 수업을 허락 하셨어요. 그렇게 그림 공부를 하게 되었어요. 미술학교를 졸업하고는 외국어를 배우기 위해 대학을 갔어요. 4년 동안은 작업을 하지 않았어요.


프랑스에 온지 2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불어를 유창하게 하는게 그때 불어를 배웠기 때문이군요.

-나의 첫 고등교육이 프랑스 철학, 문학, 언어였어요. 첫 외국어가 불어, 그 다음 영어, 이태리어였어요. 외국어 교사 자격증을 땄죠. 그런데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꿈을 실현시키고 싶었어요. 그래서 오드사 Odessa 예술학교에 들어갈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복도에서 그 학교 교장을 마주쳤어요. 그래서 그에게 말을 걸었어요. 시험전에 당신에게 나의 작품들을 보여주고 의견을 듣고싶다고 했어요.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어요. 내가 정말 작가로서의 길을 갈수 있는 재능이 있는지, 아니면 단순한 ‘’어린아이의 변덕’’같은건지 나 스스로 알고 싶었어요.


그래서 교장의 반응은 어땠어요 ?

-나의 이 같은 행동에 그가 많이 놀랐어요. 그때 나는 많이 진지했고, 너무 직설적이었거든요. 나의 작품들은 보더니만 재능이 있다고 했어요(특히 수채화 그림을 좋아했어요) 그리고는 시험 볼 필요도 없이 예술 이론과 역사 면접 시험만 보고는 바로 2학년으로 월반해서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렇게 오드사 예술학교에서 공부하게 되었어요.


오드사 예술학교에서 주로 어떤 작업을 했나요 ?

-오드사 예술학교에서 정물화 작업을 많이 했어요. 그러면서 정물화에 대한 열정이 생겼어요. 내가 꽃을 그리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바로 알았어요. 그런데 정물화가 습작 역할만을 한다는게 좀 슬프더라고요. 18세기 네덜란드에서는 정물화가 단지 사물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게 아닌 사람의 심리 상태를 표현하는 한 방식이었어요. 정물화의 사물안에 온갖 의미들과 신비한 언어들이 숨어 있는거에요. 정물화의 대상이 되는 나비, 새 등이 부, 질병, 혹은 임신 등 어떤 상징과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에요, 정물화 사물에 깃든 상징성을 알고있다면 그안에 숨은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할거에요.


정물화에는 여러가지 사물들이 있는데요, 주로 어떤 사물들에 관심이 있었나요 ?

-나는 모든 이들이 같은 가치로 여겨질수 없는 개인이나 가족의 사물에 관심이 있었어요. 그건 몇몇 특정인들에게는 아주 귀한 것들이고, 친밀한거죠.


그럼 그런 지극히 개인적이고, 친밀한 사물을 정물화시켜 어떻게 관객들과 소통할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 

-작품마다 관련된 콩트 같은글을 써요. 그게 내 나름의 한 소통 방식이에요. 예를 들면, 정물화 중에 푸른 접시가 있는데, 그 접시는 250년 전에 만든 것인데, 나의 증조 할머니가 오드사에서 1917년에 구입했다고 해요. 접시 스타일은 독일 로코코식인데, 아주 비싼 가격에 구입하셨대요. 그런데 2차대전 막바지인 1944년에 증조할머니는 오드사를 떠나셔야 되었대요. 왜냐하면 증조할아버지가 독일인이에요. 그때 베를린에 계셨다고 해요. 그때 이 접시를 가지고 가셨대요. 증조할머니는 특히 당신의 물건에 애착이 있으셨다고 해요.  그리고 2차 대전이 끝난 후에 오드사로 다시 오려고 했는데, 당시 스탈린 법 때문에 정적이 되어 시베리아로 가야 했어요. 스탈린이 죽은 후에 오드사로 다시 돌아오실수 있었는데, 그 모든 여정에 이 푸른 접시를 항상 가지고 다니셨다고 해요. 이 접시는 지금 오드사 집 찬장에 귀중품처럼 보관되어 있어요. 난 이 접시는 어떤 사진보다도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나와 나의 엄마, 할머니 등 가족과 연관된 현실적이고 감동적인 물건이기 때문이에요. 이렇듯 이 접시는 나와 나의 조상과 연관된 물리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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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발디의 ‘사계’ 중 5월을 표현한 회화 작품


어릴때 피아노를 배운게 비발디의 사계로 표현한 12개(12)의 꽃 정물화 작업에 영향을 미쳤겠어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지금도 오드사 집에 가면 피아노를 연주해요. 피아노 연주하는 것을 아주 좋아해요.그리고 작곡도 했고요. 처음에는 고전음악이 나의 정물화 표현방식에 영향을 미쳤어요. 그다음에는 이 세상의 모든 소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어요. 거리 소음,기계소리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소리 등인데요. 나는 이런 소음과 소리들이 내 안으로 들어와 나의 영혼과 나의 귀와 함께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음악이 된다고 봐요. 도처에 음악이 있는거죠. 칸딘스키와 함께 일한 작곡가 쇤베르크는 음악은 정제된 소음이라고 했어요. 소음은 음악의 기본 감각이라고 생각해요.


소리, 소음 즉 음악의 영향이 작업을 할 때 나타난다는거네요.

-. 행위, ,형태로 나타나요. 지금은 음악을 들으며 작업하면서 그것을 표현해 보려고 하고 있어요.비발디의 사계를 들으면서 12개의 꽃 작업을 했는데요. 비발디에 대해 찾아보니 그 또한 사계를 작곡하면서 다른 것들과의 공감각(synesthésie)을 연구했더라고요. 그는 먼저 각 개월마다 가사, 시를 작사하고 그 다음에 그가 작사한 시를 낭독하면서 멜로디를 찾았더라고요. 또 그 멜로디를 통해 다른 곡의 가사를 작사했더라고요. 다른 작가들을 만나고 작품을 보면서 새로운 것, 새로운 생각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내 스스로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았다고 생각했을때 이미 누군가들이, 혹은 한두 세기전에 발견한 것들이었다는 걸 알았을때 내 생각의 증거를 만난것 같아 자부심이 들고 좋았어요.  내가 다른 예술가들의 생각에 함께 참여했다는거죠.  


왜 비발디의 사계를 선택했어요 ?

-사계절마다, 일년의 12개월마다 그 나름의 특성이 있듯이 사람들의 성격도 그렇다고 생각했어요. 사람의 성격이 자연처럼, 안정되지는 않죠. 작업을 할 때 항상 사계를 들었어요.1 월을 작업을 할때는 1월곡만 5,6 시간씩 들었어요. 비발디의 사계에는 각 계절마다 3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봄의 첫 악장인 알레그로를 1월로 보고있어요.


지금 걸려있는 작품은 12월인 것 같아요.

-나에게는 아니에요. 좋은 질문이에요. 목적은 관객들에게 어떤 달인지 짐작하게 하는게 아니에요. 음악을 듣고 작품을 보면서 각 자에게 어떤 달로 보는가가 중요한거에요. 목적은 다른 감성들을 비교하고, 다른 특성과 성격, 선호도 등을 보는거에요. 마치 둥근 형의 공연장에서 음악을 듣고 작품들에게 개월을 뜻하는 번호를 붙여보라고 하는거에요. 그래서 이 작품들에는 제목이 없어요.그래서 예를 들면 왜 저 작품을 12월이라고 생각했어요 ?라고 물어보는거에요. 어떤 관객에게 그림을 보여주고 어떤 달이냐고 물으면, 틀리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답을 안해요. 여기서 틀린 것은 없어요.

예를 들면 국화는 일본에서는 신성한 꽃이지만, 멕시코에서는 죽음을 상징해요. 그러니 누가 맞고 틀리고의 이야기가 아니죠. 하지만 음악을 듣고 작품을 본다면 자연과 관련된 꽃에 대한 개념과는 거리를 두게 될수 있어요. 내면으로 들어가는 명상이 되어 어린시절의 추억,개인적인 일들이 떠오를수 있죠. 나에게 해바라기는 11월을 상징해요. 개인적인 일로, 오드사 예술학교 정물화 수업 때 해바라기를 그렸는데 그날 하루종일 비가 왔어요. 나갈수가 없을 정도로 비가 많이 와서 학교 안에 갇혀있다시피 했어요. 그때 해바라기 정물화의 배경색을 짙은 푸른색으로 했어요. 선생님이 보시더니 처음으로 소녀에게서 회화를 남성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봤다고 했어요. 그게 나에게는 큰 칭찬이었어요. 그때가 11월이었어요. 


을 사진 찍은 사진 작업에 대해 이야기 해주세요.

-사진 작업에서 은 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요. 나는 일상의 평범한 소재들에 가치를 주고, 철학적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해요. 사실 철학적인 의미와 가치는 이미 지니고 있는 것인데 많은 이들이 잊고 있어요. 6년 동안 사진을 찍어 많은 사진들이 모이게 되면서, 혹시 이게 집착이 아닐까 싶기도 했는데요, 나를 이끈 것은 에 대한 철학적인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은 판도라의 상자 같아요. 사람들이 이런 질문들을 하죠 : ’내가 여기 왜 있지 ?, 왜 태어났지 ? 삶의 목적은 ? 내가 무엇을 하고 싶어하지 ? , 이런 질문들을 할때마다 문을 여는 거라고 생각해요. 대학갈 때도 문을 여는거죠. ‘은 미래를 향한 발걸음이라고 생각해요. 을 열고 난후는 몰라요. 나의 사진작업에서 은 알수 없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일종의 호기심일수도 있고요. 그러고 보니 내가 사진 찍은 문들은 모두 닫혀있었어요. 신비로운 미지의 세계를 표현하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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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 사진 작품 (우크라이나, 오드사 2015)


여성들(소녀들) 초상화도 있네요.

-파리에 있는 여러나라의 여성들 초상화를 그렸어요. 각 초상화마다 다른 기술을 선택해서 작업을 했어요. 그녀들에게 왜 파리인가 ?’ 같은 질문을 해가면서 작업을 했어요. 그녀들의 꿈, 가치관 등을 이야기하게 하는, 일종의 일기 같은 초상화 작업이었어요. 왜 여성들이었냐면요,  왜냐하면 여성들은 영감을 주는 뮤즈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에요.


여러 작품들이 있는데요,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요 ?

-파리에 와서 작업한 신비의 정원이에요. 왜냐하면 이 작품을 하면서 나의 스타일, 테마를 찾았고, 테마와 관련하여 나의 독자적인 표현 방식과 기술을 찾을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이 작품을 통해 예술가가 된것 같아요. 누군가가 이 작품을 보면 바로 갈리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면 해요.


신비의 정원에서 느껴지는 정신 세계와 을 사진 찍은 사진작업도 철학적인 걸 보니 혹시 믿음(종교) 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스 정교를 믿고 있어요. 믿음과 작품에 대해 크게 연관시켜서 생각지는 않았지만요. 당연히 영향이 있겠지요. 나의 인식과 습관, 생활이 몸에 배여있기에 작품으로 나타나겠지요.


오드사와 파리에서 작업할 때와 다른 점이라면요

-신비의 정원작품은 파리에서 구상해서 했어요. 오드사에서는 주로 정물화 작업을 했어요. 거기선 아카데미식 혹은 예술학교에서 원하는, 주로 고전적인 작업을 했어요. 그런데 파리에 와서는 내가 가지고 있던 고전적인 작품 아이디어들을현대적인 것으로 변화시켰다고 볼수 있어요. 다른 기술과 다른 스타일들을 섞어서 표현해 보았어요. 파리에 와서 작업을 훨씬 자유롭게 했어요. 어떤 제한된 스타일과 기술에서 벗어났어요. 여기서는 아무도 그렇게 하면 안돼’, ‘그것을 사용하면 안돼’, ‘그럼 관객들이 이해를 못할거야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앞으로 파리에서 계속 활동할 계ᅙᅬᆨ이에요 ?

-, 일단은 학교 다니는 동안 배우면서 계속 작업할거에요.    

                                                                                                            

                                                                                                                                       <파리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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